2020-03-15
매너리 - 리스트가 피아노 소나타는 오로지 한 곡밖에 안 썼습니다. 이 작품 37분, 38분까지 피아니스트는 기량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점차 끝나가는 듯하다가 곡 끝나기 바로 직전, 다시 한번 세상에서 가장 난도 높은 연주를 해야 합니다.
소피 - 피아니스트를 공포에 몰아넣게 만드는 작품이죠.
매너리 - 곡의 마무리를 피아노 가장 저음을 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대장부 - 사실 이걸 모르고 듣다 보면 끝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죠. 마무리가 애매해요.
매너리 -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어요. 40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쳤는데 마무리가 이렇게 되니까 박수도 안 나오고 반응이 썰렁하거든요. 어쩌면, 이게 리스트의 마음 아니었을까요? "더 이상 나에게 관심 갖지 말아 주세요"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p.367-368.
눈을 뜨고서도 바로 침대에서 탈출하지 못하였다. 뭐, 일요일이니까 아무래도 괜찮지. 배가 몹시 고팠지만 희한하게도 먹고 싶은 것 대신 'La Campanella'가 떠올랐다. 제목 그대로 종처럼 땡! 하고 머릿속에서 저 단어가 울렸던 것. 그럴 때는 누운 채로 유튜브를 켜준다. 오늘은 매번 듣던 키신의 버전이 아니라 손열음의 연주를 찾아 다섯 번은 넘게 들은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예쁘고 화려하고 파워풀한 곡.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지난달까지 월 1회씩 4회에 걸쳐 들었던 강의에서 나눠준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까지 끌어들여 들은 강의 치고는 기대에 한참 못 미쳤지만 - 미안하다, 딸기야 - 나름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목차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찾아 펼쳐놓고 샐러드를 씹으며 슬렁슬렁 읽어봤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을 모티브로 쓴 피아노 곡이라고 한다. '청아하게 들리지만 연주하기는 세상 가장 어려운 곡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피아니스트들도 이 곡을 아주 싫어한대요. / 좀 잘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자기 과시용으로 연주하죠. / "나 이 정도 치는 사람이야" 보여주고 싶을 때 백 마디 말보다 효과적인 곡이니까요. p.341.' 뭐야, 되게 멋있잖아. 뛰어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시대를 잘 타고난 스타에 미남이기까지! 그러나 매력적으로만 보이는 그의 삶에도 슬픔과 고뇌와 좌절이 있었겠지, 또 그만큼 기쁨과 환희와 행복도 자주 느꼈겠지, 그 모든 것이 곡에도 연주에도 스며들었겠지, 먼 옛날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연주자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는 리스트의 작품. 그런 리스트 작품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연주자들에 대한 소개를 읽다가, 이번에는 '조르주 치프라'의 이름을 알게 됐다. 전쟁을 겪으며 포로가 되고 오른손 인대를 다친 피아니스트라니(나중에는 소중한 아들까지 잃고 결국 망가졌단다). 그렇게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 남기다니. 1921년 '헝가리안 랩소디' 연주를 찾아 들으며(보며) 그저 한참 조용할 수밖에.
그러는 사이 지난 며칠 동안 내 삶에 일어난 작은 해프닝들이 갑자기 너무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아, 시시해. 삶의 스케일이 고작 이 따위야! 뭐 이런 기분이랄까. 어쩌면 오늘 아침의 '라 캄파넬라'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울린,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맑고 아름다운 종류의 경고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