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둑놀이

2018-06-18

by a little deer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조차 덥게 느껴졌고 공기에서도 무더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숲의 소리가 들렸다. 새들의 날갯짓,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소리, 꽃잎을 스칠 때마다 꿀벌들이 만드는 작은 날개 소리. 심지어 히스 덤불 속과 비탈길을 따라 피어있는 장미꽃 속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의 발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코로 심호흡을 하며 앞으로 어떤 긴 여행을 하더라도, 또 나의 생이 어떻게 변한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이곳의 모습을 잊지 못하리란 생각을 했다. p.44.


어젯밤에 생각 난 책은 바로 이거였다. <여름엔 북극에 갑니다>에서 '고요함 속에 분주함이 있다. 굳이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녀석들이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것 같은 절대 침묵 속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바닥에 붙어 꿈틀거리고 꽃잎 속에 숨어서 움직인다.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뭇 생명이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더 작은 소리를 내며 살고 있다. p.242.' 이 문단을 보고 곧바로 떠올렸다. 노르웨이의 작가 퍼 페터슨. 그는 오슬로 출생으로 막노동꾼으로 생활하다 나중엔 도서관 사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단다. <Ashes in My Mouth, Sand in My Shoes>로 데뷔했다는데, 그건 읽어보지 못했다. 아마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된 유일한 그의 책일 듯. 아무튼 숲에서의 저 장면은 읽은 후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숲길을 걷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생의 한 순간.


퇴근하고 치킨을 시켜놓고 월드컵을 시청했다. 한국과 스웨덴의 경기. 아깝게 지고 말았다. 경기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제 스웨덴 하면 얼마 전 그곳 어딘가로 이민을 간 친구의 친구가 떠오른다. 우리 내년에는 함께 스웨덴에 가보는 거야? 친구에게 물었었다. 멀고 먼 나라지만 조금은 가깝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뉴질랜드가 그렇고 인도네시아가 그렇고 네덜란드와 스위스와 미국이 그렇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 친구들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그립고 애틋해진다. 단순히 부럽다거나 혹은 안 되었다, 그런 마음은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 부디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나무였으면, 하는 엉뚱한 소망을 가진 적이 있다. 깊은 숲 속 한켠에 자리를 잡은 채, 크고 묵묵하게 오랫동안 머무른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그러나 바다를 보고 싶고 그리워할 것이기에 아니 되겠다. (그러고 보니 그룻트라면 괜찮겠는데! I am Groot!) 헛소리 그만하고 치카치카하고 자야겠네. 혹시 노르웨이의 숲에는 못 가보더라도 또 핀란드의 여름 별장(mökki)에는 초대받을 일이 없더라도 경남 함양의 상림에는 가봐야지. 나는 정재일의 음악 때문에 알게 된 곳인데, 비가 오면 더 좋을 것 같다. 지난주에 보러 갔던 전시에서 빗소리를 채집(?)하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도 생각이 나네. 일단 이번 주말에는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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