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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Oct 21. 2018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하여



아무 걱정도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서 '걱정'이라는 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 걱정의 사전적 정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을 태우는 일인데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녀석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놀랄 만큼 다양하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줄어가는 통잔 잔고와 이와는 반대로 점점 늘어가는 체지방에 대한 걱정, 취직과 진로에 대한 걱정, 낯설고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대한 걱정,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혹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린 삶에 대한 걱정, 준비되지 않은 노후에 대한 걱정, 야심 차게 시작한 프로젝트의 성패에 대한 걱정, 출근길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모처럼 마음먹고 나간 소개팅에 마음에 안 드는 상대가 나올까 봐, 처음 방문하는 도시에서 목적지까지 헤매지 않고 잘 갈 수 있을지, 주변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걱정, 혼자 밥을 먹는데 음식이 목에 걸려서 혼자 쓸쓸하게 죽을까 봐, 음식을 너무 많이 시켰는데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깔끔하게 먹고 나니 이제 살이 찔까 봐 걱정, 아직 운동을 시작하진 않았지만 운동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남들이 내 인생을 허접하게 볼까 봐, 몇 시간 뒤에 있을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걱정, 내일, 혹은 몇 년 뒤에 있거나 또 없을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걱정, 길을 걷다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핵전쟁으로 지구가 반토막 나지는 않을까, 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무시무시한 외계인들이 지구로 침공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 등등. 일상의 모든 일들이 걱정거리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될 수 있다.



하루 동안의 일들을 기록해본 적이 있는가? 매일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과 떠오른 생각들을 꾸준히 기록하다 보면 인생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별 일 없는 하루들의 반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특별한 단위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반복된 하루들은 별다를 바 없이 평범한 일상의 나열에 가까웠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매일의 일들을 시간 단위로 기록해왔는데, 그 기록에는 크고 작은 걱정거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매일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이 존재했었지만 대부분은 별다른 문제없이 지나갔고 어떤 경우에는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대부분의 걱정은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더라도 지나고 보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게다가 걱정이란 녀석을 자세히 뜯어보면 사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애초에 걱정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일 수 있겠으나, 그 결정적 순간이 유별난 광채를 내는 것은 그 시점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일 수도 있다.”



굳이 장 그르니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매일같이 결정적인 순간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날들의 반복되는 가운데 내 삶의 방향성을 바꿀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든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삶이 지닌 불확실성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재난에 가깝다. 길 모퉁이에서 급작스레 달려드는 맹수, 혹은 한밤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그런 순간들이 있기에 삶은 언제든 한순간에 표정을 바꿀 수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악독한 표정으로 내게 저주를 퍼부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끊임없이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은 모의고사를 치렀던 수많은 날들과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수능을 치르는 그 시간이 내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적어도 향후 몇 년의 대학생활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삶에는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들이 꽤 존재한다. 혼자 간직하던 호감을 상대에게 고백하는 순간, 갑작스레 인도를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잠을 자다가 치솟는 불길에 벌떡 일어나는 순간, 암을 발견하고 통계적으로 몇 년의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코 바라지도 않았던 사건들.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들을 의식한다면 걱정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사소한 것으로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리고 삶이 불확실한 이상 걱정할 이유는 늘 충분하다. 그런 까닭에 죽는 순간까지도 걱정거리를 품고 살게 되는 것이다. 걱정거리는 언제든 존재한다. 그것은 명백히 사실이다. 하지만 걱정거리를 피할 수 없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살면서 마주하게 될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에 대해 나의 태도를 확실히 하는 편이 좋다. 결정적인 사건과 조우했을 때 나는 어떤 태도로 대응할 것인가. 그것이 걱정거리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나는 기동타격대였다. 사전적으로 기동타격대는 비상사태에 재빨리 출동하여 적에 대응할 수 있도록 특수 훈련을 받고 특별한 장비를 갖춘 부대를 말한다. 문제는 그 비상사태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평온한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해도 당장 오늘 밤에 치명적인 사건이 터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말이든 새벽이든 초소에서 무장을 한 채로 경계를 서고, 근무지에서 cctv로 부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24시간 365일 출동태세를 유지했다. 침투한 적에 대한 대응 및 섬멸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병력이 바로 우리였기에 만약 상황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잠을 자든, 밥을 먹든, 책을 읽든, 무엇을 하고 있든 즉각 전투에 필요한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출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조직의 존재 이유였고, 또한 너무 절대적인 임무이기도 했다. 그동안의 모든 순간이 완벽했다 한들, 단 하나의 사건에 대처를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조직이 되는 셈이다. 



우리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5분 대기조였다.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전투화를 신고 방탄조끼와 헬멧을 착용하고 실탄을 장전한 총기로 무장한 채 사건 현장에 투입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5분 이내여야 했기 때문이다. 5분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막상 상황에 맞게 최적의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소에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을 거듭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완전 무장을 하고 신속하게 출동하는 훈련을 반복하고, 상황을 가정하고 차량과 병력을 배치하고, 야간 투시경을 장착한 채 사격을 연습하고, 분대 전술 및 이동술을 익혀가며 상황별 대응책을 숙지했다. 발생 가능한 모든 사건들에 대한 매뉴얼을 내재화한 셈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24시간 동안 어떤 사건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언제 사건이 일어날까 걱정하면서 초조해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에 대한 충분한 훈련을 해왔고,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저 훈련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다면 아무리 당황하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대응책을 마련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로 대처해야 하는가. 나는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차가운 가스실에서 스러져간 무수한 목숨들과 같이, 빅터 프랭클 역시 죽음 앞에 놓여있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는 물론이고 당장 내일의 삶을 희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인간이 지닌 최후의 존엄인 자유의지를 지켰다.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낙담하는 대신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절망과 고통이 가득한 수용소에서 그는 환자들을 돌보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자처했다. 어떤 상황에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추구했던 의미였던 셈이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태도에 달려있다. 내가 처한 환경이 내 삶의 의미를 좌우하게 두지 말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것. 이것이 내가 이제껏 지녀왔던 삶의 태도였다. 그래서 지금껏 나는 업무를 할 때는 업무에만 집중하고, 잠을 잘 때는 아무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잠을 자고, 밥을 먹을 때는 정말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렇게 주어진 상황과 주어진 하루에 충실했고, 어쩌면 결정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었던 매 순간에 집중했다. 여전히 언제 어디서 사건이 발생할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면서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순간들을 놓치지는 않도록.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걱정할만한 일들은 내 삶 곳곳에 늘 존재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이라는, 어쩌면 내게 주어진 삶의 전부가 될 수 있는 이 순간에 집중하려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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