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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랜드 Jun 10. 2024

그 사람들은 왜 책 읽는 것을 추종할까

자유로운 적당함과 책의 세계

 책 읽는 게 왜 그들한텐 절대적이 되었을까


 삶은 여러 가지 색과 소리로 구성된다. 누군가는 한 칸의 조명이 켜진 주방에서 저녁밥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시가를 태우며 오토바이를 탄다. 우리 같은 호기심쟁이들은 별 시답잖은 일에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몰두하려 한다. 시간은 쉽게 지나가고, 우리는 그 시간 위에 감정을 널어놓곤 한다. 바람이 불면 마르기도 하지만 비가 오는 것은 감정이 젖기 좋은 것이다. 삶에서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색을 가진다. 마치 팔레트에서 색을 고르듯이 적당히 몇 개를 집어 들어 적당히 섞어보곤 한다. 감정이 마를지 젖을지 휘날릴지 적당하게 걸려있을지에 관해서 그 주인은 아주 적당하게 모른다. 다만 사람은 겨우 한 칸의 시간을 들여 해가 나는 곳을 찾아다니고, 적당히 습한 곳을 따라다닌다. 그 방식엔 정답이 없다. 풀이법이나 해설이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군가 방식에 정답이 있다고 하며 그 난잡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 행동은 그저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단순하게 치부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그는 그저 그가 살아온 삶에 있어서, 자기가 겪은 일들만을 기억하고 또 자기가 경험한 일들만을 되짚는다. 일종의 계시라고 해야 할까. 그는 말한다. 삶은 이렇게 살아야만 성공한다고. 또 성공은 무엇을 동반하는 지도 알려준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얘기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또 성공한 삶을 이룩할 수 있을까? 정말 삶에는 방식과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꼭 운동을 해야지만 몸이 건강해지고 자기 전에 명상을 해야지 정신이 맑아지며, 책을 읽어야지만 교양 있어질까? 본질은 정답을 찾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맨 처음 얘기한 말처럼 누가 어떤 방식을 따라야지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결국 그는 그렇게 얘기한 것뿐이다. 그 사람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방식으로 건강을 찾으려 노력한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 전에 명상을 하면서 그 하루의 잡념과 상념을 먼지 털 듯 털어내려 한 것뿐이다. 그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얻기 위해 그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시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책을 읽어야지만 교양 있어진다는 말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삶에 방식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 말은 결국 감정은 시간 위에 걸려있는 것뿐이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시간이 어디를 관통하는지는 그 누군들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는 이쯤에서 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삶에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는 것. 그 첫 단계는 태어나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자유를 갖는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들, 사람들은 자유롭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자유롭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자유가 왜 자유라고 칭해지는지, 자유는 왜 생겼는지 무엇이 자유인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가. 자유를 가지려면 자유가 무엇인 지 알아야 한다. 조금은 심각할지도 모를 단어를 낚싯줄을 던지듯이 간단하게 설명해 버린다면, 지금 내가 말할 자유는 무한함을 칭하지 않는다. 자유는 가능성을 측정하지 않는다. 자유는 결과를 갖는다. 더해서 자유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말미암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전에선 ‘어떤 현상이나 사물 따위가 원인이나 이유가 되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면 자유의 뜻은 ‘스스로가 원인이나 이유가 된다’고 풀이해도 괜찮지 않은가. 자유는 전지전능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무한함을 품지 않는다. 낚싯줄이 꼬였는지 많은 것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무엇이 잡혔는가 보고 싶은가? 조금 더 가까이 와보길 바란다.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우리의 삶에 제한을 풀어버릴 테니까. 우선 더 자세하게 설명한 자유는 생각보다 적당하게 쉽다. 당신이 아파트 옥상 위에서 날고 싶다고 뛰어내린다면, 그대로 낙사한다. 뛰어내릴 수 있는 자유는 갖지만 날 수 있는 자유는 갖지 못한다. 당신에겐 날개나 비행엔진이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무작정 핸드폰을 먹는다면, 그대로 응급실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배가 고프다고 무엇을 먹을 수 있는 자유는 갖지만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자유는 갖지 못한다. 당신에겐 그런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춥다 해서 옷을 껴입었다. 여러 겹. 몸은 좀 둔해질 수 있겠지만, 안에서부터 심장이 뛰고, 적정온도보다 살짝 더 높은 혈액은 몸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몸을 데운다. 열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옅게나마 후끈함을 느낄 것이다. 당신 몸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어서이다. 자유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제약이 있다. 세상 가장 간단하고도 명료하고 직관적인 ‘나’가 제약이다.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제약이 될 수 없다. 살인은 내가 저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에서 혹은 어떤 의무적인 신념에서 발생한다. 즉, 자기가 그러하고 싶다는 게 원인이 되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이 어느 나라에 살고 있고, 그 나라에서 살인은 금지하고 있다면 이는 자유를 제약한다. 쉽게 말해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결과도 고려할 자유를 갖는 것이다. 자유는 결과를 갖는다.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했고, 시간이 지나 내 몸은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이는 자유의 결과이다. 내가 원인이고, 자유는 그 과정을 칭하는 단어에 불과하고, 낙사는 그 원인의 결과이다. 결국 자유는 전지전능하지 않은 나를 원인으로 하는 결과이다. 스스로가 성공하고 싶어서, 내 주변 가족을 챙기고 싶어서, 복수를 하고 싶어서 그 무엇이 이유가 되던지 간에 현상이 발생하면 그 원인이 나라는 것. 그것이 자유이다. 나로 말미암아서 어떤 것을 해내는 것이 자유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삶에 발생하는 모든 혹은 일련의 사건들이 내가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그 이유는 법이 되었든 문화가 되었든 그 어떠한 형태이건 간에 나보다 강하고, 나보다 제한을 갖지 않는다.



 자유를 알고 나면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는 법을 알아낼 수 있다. 삶도 결국은 나라는 인간이 겪는 일종의 과정일 뿐이니 말이다. 자, 우리는 지금 자유로운가? 우리는 우리를 이유로 갖고 사는가. 만약 진실로 그러하다면 우리에겐 의문이 하나 들어야 한다. 내가 이유이면 원하는 결과를 자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의문. 현실로 와서 내가 돈을 필요로 하니까 돈을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 중 정확히 쉬운 이야기가 나왔다. 어쨌거나 당신은 방금 이 문장을 읽은 순간이 최후의 지금일 테니. 지금 살아가는 당신에겐 돈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좋은 수단 중 하나이다. 그래서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을 수 있는 원초적이고 단순한 조건이고, 요소이다. 그러니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부합하니 자유를 안 우리에겐 돈은 그저 삶의 방식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닌가. 단순히 생각하면, 내가 이유가 되었고, 결과를 갖고, 또 실제로 무한하지 않은 돈은 자유롭다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와 더불어 당신은 원하는 만큼의 돈을 갖지 못할 수 있다. 현실에 나왔으니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모든 이는 자유롭다. 민주주의가 기본전제인 국가는 어쨌거나 비교적 자유롭다. 민주주의가 기본전제가 아닌 국가는 아닐 수 있다. 왕정이라거나 부족사회라면. 실제로 그곳은 그 국가의 원수가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자유를 갖는다. 자유로운 이는 그것을 보장받지만 그것이 돈을 원한다 해서 돈을 가질 수 있다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돈을 원하는 만큼 벌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에 관해서 전문적이지 못하다. 단적인 예를 들어본 것이다. 돈은 거의 모든 이가 원하며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돈은 좋은 수단이다. 나는 돈을 좋은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삶의 방식에 아무런 제한을 갖지 않는다는 건 큰 메리트가 있으니 어려울지 모르지만 수단이 무엇인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수단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도구를 칭한다. 그러니 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도구이다. 돈은 도구로서 활용되는 존재이고, 이는 아까의 예시와 똑같다. 내가 돈을 원함이 돈을 번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까와 같이 날고 싶다 해서 몸에서 날개를 펼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안다.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고 싶다 해서 현재 수중의 있는 돈을 당장 몇 배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는 법을 알았다고 할 수 없지 않나. 내가 자유를 알았다 해서 무한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전지전능하지 않은 나를 원인으로 하는 결과를 말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려도 누군가는 그 말에 분명히 아~ 네 생각은 뭐 그렇구나? 하고 대충 치부하고 넘겨버릴 것 같기도 하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적고, 자유는 확실하거나 현실적인 얘기가 아니게 되는 걸까. 정말 이것이 끝일까.



 인간은 모든 곳에 범위를 갖는다. 인간이라 칭하기 어려운 인류가 살아가던 시대에도 그들은 범위를 가졌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범위. 가면 되는 곳, 가면 안 되는 곳을 구분하는 범위. 맞으면 죽는 것과 맞아도 괜찮은 것을 구분하는 범위. 오늘날은 그것뿐이겠는가 훨씬 번잡하고, 복잡한 곳에서 범위를 갖는다. 어떨 때는 엄청나게 예민하다. 예를 들어 종교와 법은 특히나 예민하고 복잡하다. 이는 쉽게 해석할 수도 없고, 구분 짓지 못하지만 범위를 갖는다는 것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범위는 적당히를 모르고, 자유에도 적용이 된다. 인간은 모든 곳에 범위를 갖지만, 자유에 적용되는 범위는 굉장히 최소한을 갖는다. 인간은 가장 최소한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잠시만 아까의 예시로 돌아가보자. 날고 싶어서 옥상에서 떨어져 버린 그 제정신 아닌 인간에게 가보자. 그는 왜 옥상에서 떨어져 버렸을까. 날고 싶어서? 모순적이게도 그는 자유를 몰랐다. 자유는 전지전능한 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그는 몰랐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 제정신 붙잡지 못한 인간은 자기 등에서 날개가 튀어나올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믿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설령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더라도 그는 이미 떨어져 저세상에 가버렸는데 어떻게 내게 반박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자유는 전지전능하지 않은 나를 매개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죽고 싶어서 떨어지는 것은 본인의 자유가 이뤄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날고 싶어서 떨어지는 것은 본인의 자유를 충족한다 할 수 없다. 결국 난다는 것 자체의 자유를 추구한 것이었고, 떨어지는 것은 수단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또 있다. 날고 싶다면 비행기를 타면 된다는 것. 말 그대로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할 자유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수단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생각.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은 인간의 가장 최소한의 자유를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서 그 자유를 갖는다. 생각에서는 상대적인 것도 통하지 않는다. 생각에서는 상대조차 ‘나’이니까. 그곳에서는 완벽하게 내가 원인과 이유를 갖게 된다. 일차적으로 환경과 지적능력이 그 생각은 무한함을 갖지 못하게 하며, 생각은 그 혼자만으로는 결과를 갖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로 나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에 자유라는 것의 표면적 뜻을 충족하고, 아까 우리가 원한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의 기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유를 인간의 생각에 국한시켜 버리면 완벽하게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기 위해서 커다란 선풍기를 내 발 밑에 놓을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날기 위해서 로켓을 탈 생각을 할 수도, 가끔 제정신 아닐 땐 점프를 엄청나게 잘해서 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도 하다. 결과를 갖지 못하는 자유는 삶의 방식을 멋대로 선택하기 어려울지라도, 생각하는 자유는 모든 방식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결과를 만들 생각도 할 수 있게 한다. 방식에는 아무런 제한이 사라진다.


 자유라는 것에 설명을 하다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것을 설명해야 처음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자유의 결과 중 일부이니. 처음의 질문이 무엇이었나. 책 읽는 것이 왜 그들에게 절대적이 되었는지 물었다. 책은 생각의 자유를 적나라하게 보인다. 정말 잘 정리된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요리의 순서에 한 순간, 한 발자국도 방해되지 않고 그 자리를 찾아 놓여있는 곳. 모든 식재료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놓여 있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가장 무겁게 깔리는 향신료가 당신을 먼저 맞이할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곳에 적당히란 없다. 모든 것은 정교하고, 순서를 갖고, 또 온도를 가지며 습도를 조절한다. 가장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한 식재료는 그 색과 적당한 질감에 맞춰진 시설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화구는 가장 녹이기 어려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그 온도를 찾을 수 있기도 하고, 어느 순간 그 화구 앞에 선 이들의 땀구멍을 열 방법을 10초 내로 찾기도 한다. 칼은 날카로우며, 절삭력이 적당하다. 바닥은 그를 굳게 밟고 있는 이를 지지하며, 그 위로 흐르는 물은 그의 속도로 흘려보내준다. 적당히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주방은 손을 씻고 들어간 모두에게 맞춰진다. 그 누구가 되었든, 그 모든 이에게. 어린아이에겐 형형색색의 즐거움을 준다. 세계적인 요리사에겐 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컨디션을 제공하고, 먹는 이에겐 기억과 기분을 가져다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적당히 제공한다. 우습게도, 적당히는 없었던 주방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은 적당함을 가진다. 어린아이에겐 꿈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한 향신료의 화려한 맛들을, 요리사에겐 그가 바라는 요리가 가지는 적당함의 비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것이 꿈을, 그것이 요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 주방은 어린아이가 있어야지만 꿈이 춤을 출 수 있고, 요리사가 있어야지만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주 적당하고, 개인적인 꿈과 요리. 그것들은 모두 기억을 선물할 것이고, 기억은 살아갈 힘을 가진다.



 책을 짓는 엮는 내는 이들은 모두 주방을 설계한다. 그는 어떤 의도에 따라서 배수시설을 설치했을 것이고, 그는 어떤 편함을 위해서 냉장시설을 개수대 옆에 두었으리라. 그러나 활용하는 것은 요리사의 몫이다. 무엇을 먼저 볼 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의 자유에 따라 다르다. 그는 스스로가 이유로 원인으로 결과를 가지고 나간다. 자유로울 수 있는 주방은 책과 비슷하다. 책은 조금 더 개인적인 의도에 따라서 설계된다. 책을 적는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려 하며, 그 순간의 모든 일들을 책임지려 한다. 실제로 책임질 수 있을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을 책임지는 것은 확실하다. 거짓이더라도 말이다. 책 속의 모든 이야기는 그가 바라는 것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곳에 한 번 빠져본 이는 어딜 가든 그것을 자랑한다. 그렇게 적당한 이야기는 그에게 처음이었을테니 그는 누구에게나 그 이야기를 알려주려 한다. 그 이야기는 그에게 개인적이고 굉장히 사소하기도 하다. 심지어 거짓이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 거짓의 방식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조금씩 다른 이에게 말해보고, 말은 생각을 데우고 식히는 것을 반복한다. 생각은 철과 같이 그 유연함을 잃고, 속에서부터 밀집되고 단단해진다. 구부려지지도, 쉽게 뚫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강력해 보인다. 가장 완벽해 보인다. 마치 항성에서 생성될 수 있는 가장 밀도 높은 물질이 철인 것처럼 그는 가장 강력하고, 그 세세함을 갖춘 생각을 갖는다.



 대부분의 이는 그 강력한, 완벽한 생각을 보고, 경외감까지 느낀다. 그래서 그가 들어가 본 주방에 마치 자기가 갔었던 듯이 이야기를 한다. 그 강력한 생각을 가진 이는 더 많은 이에게 주방을 보여주고, 책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듣는 이들과 보는 이들에겐 동감을 얻게 하고, 공감을 산다. 마치 그들이 직접 그 주방에 들어가 본 것처럼 마치 그 꿈을 꿔보았던 것처럼, 또 그 요리를 만들어본 것처럼 혹은 먹어본 것처럼 해버린다. 그들은 주방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손을 씻어보지도 않았다. 재료를 만진 적도 그 칼로 무언가를 썰어본 적도 식재료의 신선함을 씹어본 적조차도 없다. 그런데도 태양보다 뜨겁게

이야기를 얘기한다. 정작 그들은 누군가가 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지만, 그는 쉽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 적당함을 찾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그 철과 같이 강한 생각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삶을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 만약 그들이 책 속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면, 주방에 들어가 봤다면 그가 무엇을 보았을지 무엇을 들었을지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공감과 동감을 갖지 못한다. 마치 상상과 같다. 몽유병 환자처럼 눈은 뜨지도 않은 채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그들은 책을 추종한다. 뒤를 따라서 쫓는다. 추종은 그들을 가리킨다. 적어도 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따라오게 한다. 마치 태양처럼. 그만의 중력이라도 갖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칼을 집어 보는 것임을, 결국 완벽한 것은 물을 틀어보는 것임을, 결국 닿아야 할 것은 자신의 이야기임을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을 찾는다. 그들은 자유를 찾는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심지어 그들은 오만하게도 성공을 찾는다. 성공이 무엇인지 들었던 것뿐이면서. 나 또한 그렇다. 오만하고, 마치 내가 주방에 있는 줄 안다. 알았다. 그래서 사라져 버린 자유가 무엇인지 더듬거리며 찾아볼 뿐이다. 캄캄한 방 안에서 스위치를 찾듯, 더듬거리고, 기고, 손을 뻗는다. 무엇이 잡힐지, 무엇이 보이기나 할지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주방에 들어가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듯이 나도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손을 뻗어보는 것이다. 스위치를 켜보고 싶다. 그곳이 어디일 진 모르지만, 내 이야기가 없는 책을 추종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는 내 것이다. 아까처럼 거짓의 방식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듯이, 그곳이 피가 낭자한 잔혹한 현장이더라도 그 공간까지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은근히 믿는다. 그곳은 주방처럼 내게 적당함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불을 켜기 전엔 모르지만 내가 이유가 되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누구도 찾지 못한 그 자유로운 적당함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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