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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랜드 Aug 08. 2024

무너진 다리

나를 사랑하나요? 9화


톡, 툭, 투둑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자, 나는 마치 불에 손을 집어넣다 빼듯이 화들짝 하고 깨어났다. 어제와 같은 저녁이 찾아왔다. 같은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상태는 보란 듯이 편안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린 시절 막 열이 내린 순간과 같은 방식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이 얼마나 될까. 혹은 꼭 겪어야만 하는 감정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의 결론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 있고, 그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와서 내 모습을 보자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의문이 생겼다. 왜 나만 이렇게 감정에 치우쳐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금껏 그랬다. 그건 감정에 치우쳐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사로잡혀 행하는 일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매번 그랬다.


유독 다른 이들보다 감정에 소모하는 힘이 더 컸으며, 감각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순간의 감정을 없애버리려고 바쁘게 살곤 했다. 아낌없이 힘을 써버리고, 하루간 기진맥진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러면 잠에 쉽게 들었다.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일 뿐이고, 나는 어제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이상한 여유에 나는 문득 겁이 났다. 그래서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을 살짝 열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습하고 더운 내음이 내 폐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고 나서는 어제 엄마가 있던 자리를 쓸어보았다.


그러곤 눈을 잠시 감았다

아픈 척할 때 하는 기침처럼 별 것 아니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치 모든 것이 영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내가 존재하는 이 공간이 모두 다 영화에 불과하고, 나는 아까와 같은 물음을 가질 수 있는 정도. 그니까 겨우 감정에 치우친다는 것을 이해하는 영화 관람객으로 인식하곤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다리를 꼭 다시 세워야 했다. 세상과 나를 이어주고 있었던 그런 다리. 나는 지금껏 살아온 방식으로 그 다리를 겨우 세웠고, 어정쩡하더라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당연하게도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어제의 그 일은 지금껏 버텨온 세상과의 다리에 있던 흠집을 더욱 무참하게 깨부수고 있었고, 그건 그 다리를 무너트리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관람객일 뿐이라고.


 나는 극장에서 나가는 것을 택했다. 다시 또 삶을 살아가야 했다. 지금 당장 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게 살아야 할 이유였다. 무너져버린 다리는 내가 다시 세울 수 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먼저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켜곤, 머리를 쓸어 넘기고, 옷을 갈아입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혜원이는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애를 불러내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 혜원이는 대학시절 만난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많은 것을 나와 공유했지만 가장 많이 공유하는 건 술 취향이었다. 그 애는 오밀조밀하게 모인 이목구비가 얼굴의 면적 속에서 겨우 숨 쉬는 것처럼 얼굴이 작았다. 동그란 눈에 그 눈꼬리가 약간 날카로운. 그래서 가끔 눈웃음을 지을 때면 마네키네코와 닮아서 나는 그 애를 네코라고 부르기도 한다.


별명에 걸맞게 그 애는 하는 짓도 고양이 같다. 어딘가 엉뚱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또 어떨 때는 아무런 이유 없이 정신없이 쏘다니고 시끄럽게 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랑 술 마시는 것이 즐거웠다. 그 애가 보이는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날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나는 바로 지갑을 들고, 핸드폰을 챙겨선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의 저녁이라 수평선 저 너머로 빠져버리는 것 같은 노을을 바라보면서 택시를 타고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그 애의 집은 내 집과 정반대라 도심 중앙 쪽에서 만나는 일이 잦았는데, 이번엔 그 애의 집으로 내가 가기로 했다. 마침 그 애의 부모님이 미국의 포틀랜드로 여행을 떠난 터라 나는 세계주류매장에서 파는 수정방을 사서 그 애의 집 벨을 눌렀다.


나는 그 애를 보자마자 오늘 본 노을보다 더욱 불타는 웃음으로 그 애에게 안겼다. 쾌적한 공기가 집안을 감싸고 있었고, 나는 진심으로 그 애가 너무 반가웠다. 나는 나름 흡족한 표정으로 수정방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그 친구도 고량주를 좋아하는 터라 우리는 같이 웃으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애는 집안에 있는 몇 가지 즉석식품을 내왔고, 나는 마침 사 온 과자를 같이 뜯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쓰레기봉투처럼 우리는 아무렇게나 몸을 흔들어가며 수다를 떨고, 웃음을 지었으며 시끄럽게 방안을 울려댔다.


우리는 서로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도 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캠핑을 갈 궁리도 했다. 혜원이네 부모님은 캠핑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터라 많은 곳을 여행하셨고, 나는 그 애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 실제로 거기에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더욱 다양한 주제를 끄집어와서 얘기를 했고, 술이 모자라기 시작했을 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와 더 마셨다. 나와 혜원이는 주량도 엇비슷해서 항상 둘이 고량주 한 병을 나눠마시면 취기에 놓이는데, 혜원이는 내가 더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자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가 웃음을 지으며 웬일이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맥주를 몇 캔 더 까면서 과자에 향하는 손길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졸음이 몰려오는 순간이 왔고,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 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나는 베이스기타만이 가질 수 있는 선율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다가 한순간 고개를 들자, 그 애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겨우겨우 그 애의 몸을 일으켜선 침대로 향했다. 어찌나 무겁던지. 술이 다 깨어버린 거 같았다.


나는 너무 힘든 나머지 깔려있던 이불을 혜원이에게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문득. 갑자기 찾아온 기억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건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그런 식으로 생겨났고, 아무것도 없을 때 빅뱅이 시작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는 어제와 다르게 기억과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이 회상을 시작했다.


만 19세 그리고 겨울의 마지막.


겨울의 마지막은 언제나 울림을 더해갔다.


결국 차가운 몸짓 하나 남기고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으나, 남은 몸짓 하나가 너울너울 흩날리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건 하루만의 시간은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었으며, 그 안의 시간에 담아내기에 많은 감정들이 절묘하게 전달되어서 그렇기도 하다. 그건 차가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겨울은 그렇게 끝을 전해 가고 있었다. 봄이 저 멀리서 입김을 불기 시작할 때 그니까 유난히도 하얀 수연의 얼굴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때 고드름은 차가운 물방울 하나하나 떨어지고 있었던 때의 그 겨울의 끝.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경찰은 그리고 형사는 그녀에게 이렇다 할 소식을 들고 오지 않았으며, 수연 또한 점점 엄마가 사라진 일상에 발자취를 늘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거나 혹은 의도한 대로 나간 것이니 자신이 붙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많은 것들을 해나가고 있었다. 옷은 짧아져 갔고, 많은 집집마다의 창문이 열렸지만 그녀의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수연은 사람은 몇 년 간 받은 사랑으로도 충분히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혼자라는 감정을 여러번 겪고 있었다. 그녀는 성인의 첫 봄을 홀로. 정말로 혼자서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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