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나요? 10화
구름이 찢어지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면 봄이 그렇게 시작된다. 수연은 봄의 나비처럼 혼자서 날개를 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익숙한지는 상관이 없었다. 사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익숙함이 아니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욱 많은 시도를 해가려 하고 있었다. 그건 어느 한 스무 살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하고, 어느 청춘의 발돋움이기도 했다. 그녀는 본인이 다니게 된 대학교에서 많은 일을 해내고 싶어 했었다. 경험과 추억이 가끔은 구별가지 않는 순간의 그녀는 다른 무엇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꽤나 능숙하게도 순간순간을 꾸며나가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똑똑하거나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는 아니었다. 수연은 단순하게도 지금을 산다는 것에 집중했고, 그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혹은 그걸로 어떤 걸 해내려 할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숨을 내쉬는 것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를 지칭하는 단어는 많다. 수연이 아닌 다른 이들이 나를 부르기도 하고, 나를 찾으려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은 나의 진짜 이름이나 나를 부르는 방법을 모른다. 마치 마법학교에 처음 들어간 신입생들처럼 마법주문의 간단한 스펠조차 알지 못하는 수준의 모습으로 나를 지칭한다. 그걸 듣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에겐 고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직 진수연만이 나를 정확하게 부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애만이 나의 말과 소리에 응답할 수 있다. 언젠가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었을 때 그녀는 늘 똑같이 대답을 했지만 그때는 신기하게도 처음 내 질문과 인사에 대답해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날은 유독 신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전보다 더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빠르게 질문에 답하였고, 나는 그 대답이 만족스러워 그 편안한 기분으로 다시 잠에 들었다. 수연은 나를 기억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 진짜 이름은 나도 모른다. 아무도 모든 사물을 자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단순하게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부르기 편하게 바꿔 부를 뿐이다. 혹 자연을 자연이라고 지칭한다 해서 자연이 자연이 아니게 되거나, 자연을 자연이 아니라고 해서 자연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저 그들이 부르기 위한 목적이 담긴 어떤 것이고, 그게 본질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나는 한사코 그들의 입을 막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분하게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것은 나는 그녀에 의해서 불려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나의 본질이 뒤바뀌거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에 그건 진실로 나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수연을 그녀 또는 그 애 혹은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지만 그게 그녀의 본질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걸 잘 알기에 그녀의 매번 다름을 불러보곤 했다. 기분을 물어보고, 대답을 들었다. 그리곤 매번 다른 이름을 만들어냈다. 하루는 밥 잘 먹는 꼬마, 하루는 물장구치다 넘어진 녀석, 하루는 울보,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은 그 애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나는 그 아이를 모두 다 알지 못했지만 하루하루 그 애의 다른 이름을 부를수록 그 애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합리적인 생각이나 논리를 통한 것이 아니라 그냥 당연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녀의 여러 이름처럼 그녀의 여러 모습이. 그래서 나는 매일을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고, 그 안부를 통해서 그 애의 다른 이름을 결정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반복만 되는 일이 생겼고, 나는 습관처럼 물어보던 안부와 습관처럼 만들어내던 수연이의 다른 이름들에서 어떤 단절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이후 다른 날에 그 애의 안부를 물어보고, 그 애의 또 다른 이름을 부를 때 이제 더 이상 그 이름이 그 애를 더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 아이의 안부를 묻지 않고, 그녀가 하고 있는 것들을 단순하게 관찰하고만 있었다. 나는 반복되는 것들이 끝나는 순간까지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적어도 그전까지는 그 아이가 다시 응답을 하길 바랄 뿐이었다. 더운 여름날 쨍한 햇빛 아래에서 해가 이글거리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보듯이 자꾸만 감기는 눈을 치켜뜨며 그 애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반복이 끝이 났을 때, 그니까 어떤 시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 아이는 이제 계절의 변화를 심장이 뛰는 속도로 느끼곤 했으며, 여럿 느껴지는 냄새가 드디어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였다. 그 아이의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단절된 기분을 느끼던 많은 반복이 끝이 났다. 나는 그 애가 다시 내 안부에 응답하는 것을 기다렸고, 다시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애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천천히 바라본 그 아이의 모습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길을 걸어갈 때에도 발걸음보다 고개가 먼저 움직였으며, 매번 두리번거리며 시선의 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또 온종일은 누워있기도 했다. 그저 자리에 누워 침대 위 이불의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기도 하고 그러다 그 소리에 몽롱해졌는지 잠에 들기도 하였다. 그때의 그 아이의 하루는 불꽃처럼 사라졌고, 여름의 바람처럼 가라앉아 버리는 것 같았다. 학교에 다니다가도 몇 번씩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마치 무언가 창문에 묻은 먼지를 눈길로 닦아내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애가 혼자서 하루 밤 동안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면 항상 밤은 사라지고, 갑자기 마음속에서 환한 불꽃이 타올라 아름다운 춤을 추곤 했다. 그 애는 항상 그 불꽃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면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리곤 그 후 또다시 해가 뜨는 것을 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엇인 지 모를 수연만의 확실한 어떤 게 불 피어오른 것 같았다. 수연은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지도 무엇을 보고 걸어갈지 정하지도, 온종일 누워있지도 않았다. 그 애는 이제 온종일 많은 생각과 기분에 휩싸인 채 참 많은 것들을 이뤄나가고 있었다. 대학 1학년 과정이 거의 끝나갈 때쯤엔 그토록 관심 있었던 한국사 1급 시험을 통과하기도 하고, 구에서 주관하는 봉사단체에 가입해서 많은 봉사활동을 참여하였다. 더해서 성적도 꽤 준수한 수준으로 마치었고, 학생회에 들어가서는 교내에서 행사 안내나 수강신청에 관련된 것에 대한 안내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2학년이 되었을 땐 전문 회계사자격 준비를 시작하였다.
2학년이 되고 나서 주말엔 과외를 하였는데, 항상 학생의 학습량에 관해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그게 본인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바꾸려는 시도를 하진 않았다. 그러다 여름 초 종강을 하고 나서는 집에만 박혀서 공인 회계 준비를 하였다. 간간히 시간이 날 때엔 본인이 배우고 싶었던 기초 물리학에 관하여 소논문을 써갔는데, 항상 물리학 교수가 수연을 피곤한 인간이라고 느낄 정도로 많은 질문을 쏟아부었다. 수연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많은 분야에 대해 객관화가 잘 되곤 했었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 했고, 하나라도 놓쳤다면 그날은 아쉬운 나머지 밤을 새우곤 했다. 그리고 밤이 짧아지고 있을 때 완전히 여름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