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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2025년 6월 넷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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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빡치는(빡센x) 해외 취재 관계로 오래전에 미리 써둔 글을 올립니다.]


김수영을 아십니까.


아, 제가 말하는 김수영은 시인 김수영입니다. <눈>, <폭포>, <풀> 같은 시를 쓴 작가 말입니다.


이름은 들어보셨겠죠. 짤막하게 소개를 좀 할까 합니다.


1921년에 태어난 김수영은 사실 '번역가'였습니다. 미국 잡지사에 자필로 편지를 써서 구독을 신청한 잡지를 읽었을 정도니, 아마 영어에 능통했겠죠. 일본어도 곧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어감각이 대단히 발달한 사람일 겁니다. 조금 더 과하게 해석하면, '세계관이 협소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는 6.25 전쟁입니다. 당시 북한군에 징집됐으나 겨우 탈출했다고 전해집니다. 좌우대립에 대해 강한 저항감과 자유를 외치게 된 계기랄까요.


물론 4.19 혁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진정한 문단에 오르는 계기였으니까요.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발생한 4.19 혁명. 김수영은 4.19혁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후진성을 지적하는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강렬한 표현, 대단히 자조적인 성향이 독특한 문체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절정에 슬그머니 도둑처럼 찾아오는 법이죠. 1968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48세. 김수영은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버스에 치여 사망하고 맙니다. 항간에는 당시 같이 술을 마시던 문학계 동지 '이병주'가 자신의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너 같은 부르주아 차는 타지 않겠다"며 거부한 뒤 사고를 당했다도 합니다. 그래서 이병주는 자기가 김수영을 죽였다는 자책 속에서 한참을 방황했다죠.


김수영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문학계가 동요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시인 신동엽은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고 평했을 정도니까요.


그가 했던 가장 유명한 말은 '시를 쓰는 것(詩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를 쓰는 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자기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는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김수영은 온몸으로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밀고 나간 단어들은 곧 우리나라 문학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었고, 오늘날에는 전국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수능을 위해 김수영 시를 달달 외우는 전설적인 작가가 되었죠.


그의 작품 세계는 <폭포>와 <풀>, 그리고 <눈>을 통해 '자유'를 지향했다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그리고 여기, 김수영을 입증하는 시가 2개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책에 있는 <김일성 만세>(미발표) <고궁을 나오면서>입니다.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할 수 있는 상태가 진정한 자유이며,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회가 진정한 자유 사회라는 것을 되새길 수 있게 하죠.


김수영은 언론이 '김일성 만세'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던 스스로를 성찰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할 수 있는 김수영의 단어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주입니다.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며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그런데 지금, 이런 김수영을 어슴츠레 기억하는 건, 대단히 쌉싸름한 일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애석하게도요.

강한 말만 살아남는 시대, 친절함을 바보라고 치부하는 세태.


그런 시대에 카인드하고 강단 있게 살아남기는 쉽지 않네요.


제목 : <김수영 전집 1: 시(김수영 사후 50주년 기념 결정판)>

저자 : 김수영

출판 : 민음사

발행 : 2018.02.26.

가격 : 1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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