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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2025년 7월 첫째 주

by all or review
8936434543_2.jpg 창비


[귀국 전 네덜란드의 노란 햇살 아래 있습니다. 신간 따위는 이번 주도 개나 줘버렸습니다.]


기자가 되기 전에 이 책을 기자 선배에게 받았습니다.


한동안은 잊고 지내다가 언론 고시를 준비할 때에야 알았습니다. 이 책이 언론고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시험에 도움이 되는 소설이라니. 형용모순 같아 보이지 않으신가요.



모두가 주인공


이 책은 정세랑 작가가 2016년 1월부터 5월까지 블로그에서 연재했던 작품들을 묶어 낸 책입니다.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50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요.


한 사람을 깊이 파고들어가는 연역적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주제를 뽑아내는 귀납적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의 민주화랄까요.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그렇게 맞추다 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그러니까 정세랑 작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미색(옅은 색)밖에 띠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요.

아,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시길요.

우리 각자가 미색을 띤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색을 띠어도 괜찮다는 위로인 셈이죠.


세상은 강렬한 색을 가진 인물에 반응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하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죠.



현실적인, 너무나도 현실적인


소설을 읽다 보면,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 앞에 참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가 실제 신문 기사들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꼼꼼한 소설을 썼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이 앞에서 농성하고 있는 거 봤어? 농성한다고 학교 측에서 정수기를 다 떼어갔지 뭐니. 저녁 되면 전기도 끊어버려."

"독하네요."

"학교가 벽 같아. 벽 보고 말하는 것 같아."

"우리는 이미 졌어요"

그제야 사람들이 들었다. 교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되겠지만 그렇게 말하지 말자"


'학교가 벽 같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이 느낍니다.


최근 국민대를 보면서도, 숙대를 보면서도요.


이태원참사특조위가 조사를 개시한 지 어언 한 달을 향해 갑니다.


이태원 참사 직후, 방송국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느낌도 여전히 생생합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야간자율학습 자리에 앉아있던 날, 기자를 하기로 다짐했던 감정도 생생합니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거야."
"정말?"
"몇백년 전부터 그랬더라. 먼 나라들에서도 언제나 그랬더라."


그렇습니다. 2025년 SPC에서도, 태안화력발전소에서도 여전히 비극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고 속보와 후속 보도를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거리는 기분입니다.



제정신으로 살기


잠깐 개인적인,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 아빠는 산업안전 관련한 업무를 했습니다. 아빠 따라 어렸을 때부터, 청소노동자분들과 공사장에 계신 분들을 (또래에 비해) 많이 만났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그와 정반대 직급인 분들도 봤습니다. 국장/실장/사장직급인 분들 말입니다.


제게 두 그룹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쪽에선 피자 신메뉴나 옷, 쿠폰 등을 제게 주면서 인사했죠. 다른 한쪽에선 병음료(알로에/토마토), 사탕(홍삼, 계피), 둥굴레차(티백)를 주면서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니 그때 제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는 당연히 잘 아시겠죠.


그런데 그 마음이 꼭 정답은 아니었더라고요. 그걸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십수 년이 지나 기자가 되고 난 뒤로 아빠가 제게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시행된 뒤로, 로펌들이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 나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탈법의 경계에서 돈 벌 수 있는 길이 보여. 근데.. 아이.. 참.. 아들이 기자라서 말을 함부로 못 하겠네 이거."


언젠가 부동산학과 교수님을 인터뷰할 때도 교수님이 똑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보인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한다고.


비극이 있는데, 그 비극으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절망적인 진실을 알아버린 셈이죠.


그래서 저도 비극에 온전히 반응하는 사람이 되려고 무진장 노력합니다.

제정신이 사람이 되려고 다짐합니다.

"좋은 사람, 늘 제정신인 사람"

"그건 너무 단순한 설명인데요."

"그런데 잘 없어요.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짐하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김수영 시인의 시집 독후감 끝에 말한 '착하고 강단 있게'라는 맥락이 바로 이 말과 연결되는 것 아닐까요.


박진영(JYP)이 그랬던 가요.


'열심히 살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올바르게 살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미색이 의미 있는 이유


혼자 그리 유난 떨 일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ㄹㅇ).


그런데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으면 가끔 '미친 자' 때문에 세상이 역행하기도 하더라고요.


짧게나마 내가 돌을 내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있더라고요.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내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서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 숲을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당신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훌륭한 학생은 아니지만, 소설에 나온 표현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하는 데까지, 후회 없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PS. 40년쯤 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라는 돌멩이가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겠네요.)



제목 : <피프티 피플>

저자 : 정세랑

출판 : 창비

발행 : 2021.08.13.

기타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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