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둘째 주
여기 내가 쓰고 싶어 쓴 글은 하나도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 개봉 이전에는 돈을 벌려고, 이후에는 청탁을 거절 못 해서 썼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썼단 뜻은 아니다.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어차피 맡은 일이라면 열심히 해야지. 마치 내가 스스로 쓰고 싶어 안달이 나서 쓰듯이 썼다. 그래야 즐거울 수 있으니까. 즐거워야 빨리 끝나니까. 빨리 끝내야 내 시나리오를 쓸 수 있으니까. 그런 맘으로 쓰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곤 했다. 즐거웠지만 힘들었다.
박찬욱 <박찬욱의 몽타주> 中
내가 쓰고 싶어서 쓴 자기소개서 또한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쓰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썼습니다.
그래서 떨어진 걸까요.
취업 시장처럼 찬바람이 붑니다.
한기를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점심시간에 연구원 직원분들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각자 과거 얘기를 나눴습니다. 대학, 해외여행, 인턴 등등. 문득 차장님이 쓱 한 마디를 흘립니다.
난 옛날에 서울에 적(籍)이 없다는 게 되게 무서웠다? 한낮에 한강에서 막 울었어. 너무 반짝이는 도시에서 내 책상, 내 집 하나 없다는 게 너무 슬퍼서. 그게 무서워서...
(말하진 않았지만) 우연히 두 개 회사에서 모두 불합격 통보가 온 날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을 공감하는 사람은 어쩌면 제가 유일했을 겁니다.
수많은 탈락을 겪다 보니, 연인과 이별하는 느낌이 듭니다.
'테무 이별'이랄까요.
불합격하셨습니다 = 우리 헤어져
제한된 인원으로 인하여 =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아
지원자님의 역량 부족이 결코 아님을 = 너가 잘못해서 헤어지자는 건 아니야
다음에 더 좋은 기회로 만나 뵐 수 있기를 = 좋은 친구로 지내자
누군가는 "네 자기소개서가 잘못됐을 거"라고 조언하고, 누군가는 "다 어떻게든 먹고 산다"고 위로하고, 또 누군가는 "애초에 거긴 너랑 안 맞는 곳"이었다고 토닥입니다.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너가 뭘 잘못했겠지"라며 T발 C같은 조언을 건네거나, "세상에 절반이 여자(혹은 남자)"라고 위로하거나, "원래 걔가 좀 그렇더라"라며 흉보는 말들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헤어진 건 아닌데, 헤어진 사람이 되.
반대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누군가와 헤어진 뒤 아픔을 빨리 극복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은 <맹자집주>에 나온 말처럼 정신승리를 해봅니다.
일단은, 일단은.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땐,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꺾는 고통을 주고, 그의 육신과 살갗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그의 몸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끔 한다. 그리고는 하는 일마다 원하던 바와 완전히 다르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그 사람의 성질을 참고 견디게 하여, 예전에는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주 메일함(20241106 문학동네 메일 레터 <[우시사] 당신이라면, 이별한 후에 뭘 먹을 건가요?>)을 풀어헤치다가 든 생각입니다. 여성민 작가의 시 <이별의 수비수들>이 화면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별한 후에는 뭘 할까 두부를 먹을까 숙희가 말했다
사랑하면 두부 속에 있는 느낌이야 집에 두부가 없는 아침에 우리는 이별했다
숙희도 두부를 먹었을까 나는 두부를 먹었다
몸 깊은 곳으로
소복소복 무너지는
이별은 다 두부 같은 이별이었다
눈이 가득한 사람아
눈이 멈춘 눈사람 예배당 종소리 퍼지는 지극히 아름다운 눈사람아
된장 조금 풀어서
끓여내는 이별
이어지는 한정원 작가 멘트.
이별의 끝에 흰색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쉼 없이 줄줄 흐르는 상실의 마음을 애면글면 굴리면 눈사람이 되고, 그 짠 마음이 그나마 굳어지면 두부가 되지 않을까요?
모두 알잖아요. 두부는 쉬이 허물어진다는 것. 으깨어지는 눈처럼, 으깨어지는 사랑처럼, 으깨어지는 종소리처럼.
두부는 죄를 지은 이가 출소 후 처음 먹는 음식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두부는 죄를 씻는 두부, 두부는 그럼에도 다시 시작하는 두부입니다. 세상 모든 이별은 죄의식을 품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니 이별 후에는 두부를 먹기 알맞지 않은가요.
일단 밥을 먹읍시다. 먹고 다시 돌아와요.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셔도 좋겠어요.
이별은 두부입니다.
흰색 두부입니다.
줄줄 흐르는 짠 상실감으로 뭉쳐지는 두부입니다.
쉽게 허물어지고 으깨지는 두부입니다.
죄를 씻어내는 두부입니다.
그러니, 불합격도 두부입니다.
모두 다 두부가 되었습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11화 '무한 요리 지옥 미션'에선 두부 요리가 27개나 나옵니다. '두부찌개', '황금 두부', '두부 멘보샤', '켄터키 프라이드 두부', '감태 두부 비빔국수', '유자 두부 크림 뷔릴레' 등등.
언젠간 이 두부도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하며 차곡차곡 모아둡니다.
음... 좀 많긴 한데요.
억지로 만든 두부가 언젠가 우연처럼 흑백요리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언젠간 두부를 모았던 광경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환절기> 발췌
더 길게 쓸 여력은 없습니다.
연구원도, 교회도, 삶도, 글도.
매주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어지고, 그래서 후회도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