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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or review Nov 15. 2024

한 사람조차 되지 못한 사람

2024년 11월 셋째 주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요.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요.

상상 속 어른은 잠시 침묵하다 ‘그런 일이 생길 순 있어도 그런 이야기가 남기는 어렵다’고 했다. ‘뭔가 겪은 사람만 있고 그걸 전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그러곤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남겨두어야 해, 한 사람은.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中


이번 주의 장면을 모아봅니다.

한 사람이 된 사람과, 한 사람조차 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S#1 출근길

제가 타야 하는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전 아직 횡단보도에 있었고, 출근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습니다. '다음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 놓고 있었죠. 버스 기사님이 손짓했습니다. 빨리 타라고.


- (삑) 감사합니다.

- 예~~ 오늘은 안 바쁜가 봐요?

-...... 아... 아니요. 감사합니다.


연거푸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 혼자만 '타야 할 버스'를 생각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버스 기사님도 '태워야 할 승객'을 알고 있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시각, 매일 똑같은 장소, 매일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S#2 기도

평상시에 기도해 주겠단 말을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제 진심의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제약회사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말에 "기도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저녁에 연락이 왔습니다.


- 저 면접 붙었습니다 / 기도의 힘을 받은 거 같아여 / 감삼다!


뭐라고 답변해야 할까. '다행쓰ㅋㅋㅋ 난 다 떨어져도 넌 결국 붙었네', '내가 기도빨이 좋군!', '고생했음! 푹 쉬어!!' 등을 쓰다가 모조리 지웠습니다. 대신 따봉 이모티콘을 날려줬습니다.



S#3 저녁 식사

- 이런 걸 기사로 써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나 이제 언론사 안 다니잖아. 연구원 다녀.

- 아 맞네.. (중략) 근데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학교랑 싸우는 사람들.

-......

- 들으라고 한 얘긴 아니었는데..


감자탕에 볶음밥을 슥삭거리시던 종업원께서 저를 힐끔 쳐다보셨습니다. '사평역에서' 함구하는 사람들처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며 모두가 침묵한 채 시공간이 멈춰버린 느낌입니다. "... 먹자" 제가 한 말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中


벌써 30번째 글입니다.


'푸릇한 봄'에 시작해 '작열하는 여름'을 지나 '스쳐가는 가을'을 거쳐 '마침내 겨울'이 되었습니다.

겨울이지만 수능 당일엔 춥지 않았습니다.

춥지 않았지만 마음까지 녹이진 못했습니다.

아직 마음이 녹지 않았으니, 겨울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이 겨울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고3 때 배웠던 시를 끄집어냅니다.

연거푸 삽을 씻어내는 한 사람이 저와 꼭 닮아있습니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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