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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Aug 12. 2019

다이아반지를 끼고 보니

결혼 28년만에 뜬금없이 결혼반지를 끼고 나왔다. 결혼식날 처음 끼고 이 반지는 한 달만에 내 손가락에서 빠졌다. 태생이 몸에 뭘 걸치는 걸 죽어도 싫어해서 반지도 끼지 않고 남들 다 뚫는 귀도 안 뚫었다. 중년이 되면서 목주름 훤한 것이 싫어서 목선 파인 옷 입을 때만 목걸이를 했다. 지금도 집에 들어가는 즉시 목걸이부터 끄른다.

토요일 아침 엄마가 갑자기 금반지를 찾아서 끼셨다. 통장주머니 다음으로 보물 2호인 패물주머니를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노란 쌍가락지중 하나를 꺼내 끼신다.웬일인지 모르겠다. 굳이 짐작하자면 센터에 계시는 노인들이 금붙이를 하고 계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돈 없는 노인네 취급 받기 싫으신게 아닐까?

결혼할 때 나는 패물이나 예단을 간소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양가 모두 경상도 산골의 양반을 따지는 집이다 보니 가진 건 없어도 격식은 차리고 싶어했다. 반지, 목걸이, 시계 등을 하고 예단비용은 서로 돈으로 주고 받았다. 기억컨데 우리집으로는 신랑집에 간 돈의 2/3정도가 왔던 것 같다. 애초에 보석이라든가 옷과 장신구에 관심없던 나는 큰 돈을 주고 다이아반지를 하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엄마는 달랐다. 남들에게 초라해 보이는 건 싫으신 분이기 때문에 반지도 다이아 많이 박아 받으라하고 신랑쪽에서 받은 예물에 보태서 엄마돈으로 금팔찌도 하나 더 해줬다. 그때만해도 패물과 사주단자를 받으면 집안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던 풍습이 있어서 딸 시집 잘보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게다. 아비없이 키운 자식이라는 소리를 제일 듣기 싫어하셨고 혼자 잘 키워서 잘 여읜다는 평이 엄마에게는 젤 보람이었으리라.


그렇게 받은 패물이지만 나에게는 자랑거리가 아니니 불편한 장신구일 뿐이었다. 오메가 시계와 순금 실반지만 끼고 다녔다. 아이들 돌반지는 한꺼번에 팔아 통장을 만들어 주었지만 나의 패물은 본전에 비해 헌것은 거의 값이 나가지않아 그냥뒀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언젠가 엄마가 장롱뒤 구석에서 열쇠꾸러미 넣던 허름한 파우치를 꺼내는데 거기에 삼십년가까이된 패물과 장기근속 행운의 열쇠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포항에서 지진 났을 때 우스게 소리로 '지진 나면 엄마는 통장주머니와 저 패물 파우치만 들고 나가면 되겠네'하며 웃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패물을 꺼내보며 엄마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다시 생각한다. 남 보다 잘 살고 싶었고 자식도 번듯하게 키우고 싶던 우리엄마. 지금 비록 걸음 더디고 말 어둔하지만 한때 인근 마을 일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던 '대룡산 비단장사 골래댁'! 참 열심히 살았고 많은 걸 이루었네. 오늘 다이아가 열개도 넘게 박힌 묵직한 금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우며 엄마의 자존심과 열정, 그리고 자식 사랑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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