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레 Aug 03. 2022

회사원이 반바지를 입어도 되나?

복무규정


2016년 나는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친구는 기자였고, 나는 공공기관(비슷한 곳)에 막 입사한 때였다. 오래 같이 살면서 서로의 물건에 대한 구분이 흐릿해졌고, 친구와 나는 서로의 옷을 자유롭게 빌려 입고 다녔다. 친구가 나보다 먼저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내가 보기엔 제법 직장인 다운 옷을 친구가 더 많이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차분하게 입고 싶은 날엔 친구 옷을 빌려 입고 출근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기준 차분해 보였던 회색 슬랙스 바지가 '반바지'였다는 거다. 




대략 이렇게 생긴 바지였다




사실 여자 신입사원들이 면접을 본 후 한동안 입고 다니는 '정장'은 재킷과 치마 조합이다. 키가 큰 편(169cm)이라 대학생 때 아무 매장에서 기성복으로 산 정장 치마는 어김없이 짧았고, 무릎까지 내려오지 않는 치마 때문에 활동이 영 불편했다. 치마보다도 훨씬 길고, 노출도 없고, 심지어 회색에 단정하기까지 하니 나는 이게 이상하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회사에 반바지 입고 왔니? 




그날 하루 여러 번 들은 이야기다. 당시 나는 그저 이게 왜 안되는지 궁금했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대부분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들이라, '왜?'에 대한 의문을 품고 선배나 상사에게 물어봐야 뾰족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ENTP인 나는 논쟁과 토론을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 공격성이 없는 질문도 보통은 공격으로 비치는 경우가 많다. 신입시절에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믿었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그저 이해가 안 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그때는 그걸 몰랐기에 순수하게 질문을 하고 말았다.)




회사에 반바지를 입고 오면 안 되나요?

길이가 문제인가요?


무릎까지 오는 치마는 되는데,
무릎을 덮는 반바지는 안 되는 건가요? 




답변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충 이해한다. 어떤 느낌으로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된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그때부터인가 내 여름 옷장에서 반바지는 사라졌다. 이왕이면 옷을 고를 때 회사에서도 입을 수 있는 것들을 사다 보니 점점 그렇게 되었나 보다. 원피스, 치마, 긴바지 이 정도로 정리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치마 정장







회사에는 복무규정이라는 게 있다. 물론 요즘 기업들은 이런 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좀 '공공'느낌의 조직 혹은 '보수적인' 조직일수록 입는 옷에 대해서도 일종의 규칙을 두고 있다. 내가 다녔던 회사 같은 경우에는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복무규정에 관한 공지사항을 회사 게시판에 올렸다.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은 의미였다. 




6월 1일부터 하계 복장 착용 가능

(반팔 셔츠 O, 반바지 X)




이런 공지가 올라오면 사람들은 피식했다. 사실 이미 더워진 이후라 반팔 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는데, 이제 와서 이런 공지사항을 올리는 게 무색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제력은 없고 형식적인 공지에 불과했지만 회사에서는 이런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큰 논쟁의 씨앗이 되곤 한다. 




먼저 저 공지사항에서 안된다고 한 '반바지'가 역시나 문제가 됐다. 잊을만하면 사내 익명게시판에는 복장과 관련한 불평이 올라왔다. '여자들은 치마나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남자들은 왜 짧은 옷을 입을 수 없냐'. '누구는 짧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거 같다더라, 보기 좀 불편하다'. '청바지는 되지 않을까'. '아무리 복장이 자유롭다지만 크롭티는 아니지 않냐' 등. 반바지가 쏘아 올린 공은 이런저런 불평, 험담 그리고 패션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아니 근데, 누가 회사에 크롭티를 입고 온다고??? 나도 놀란걸 보니 영락없는 7년 차 회사원이다.)








사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회사 내 논쟁을 보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반바지 입을 수도 있지, 남자들도 더울 텐데 반바지 괜찮을 것 같은데... 된다고 생각하면 또 다 가능할 것만 같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기 때문에 누가 맞네 틀리네 구분하기 어렵지 않나. 




옷을 입는 방식도 일종에 문화다. 이 문화를 바라보는 진보적 입장과 보수적 입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진보가 옳고 보수가 틀리지도 않았다. 공공기관의 특성을 감안할 때 업무상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대부분 정장을 입고 있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주 고객층이 50대 이상이었는데, 이분들을 공식석상에서 만나면서 아무런 옷을 입고 가기는 어렵다. 




물론 '공식석상'에서는 정장을 입고, '평소 근무' 때는 자유롭게 입겠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합리적인 사회인이라면 어느 정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믿는다면 복장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반드시 풀 정장이 아니어도 깔끔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은 많을 테니까. 




뭐든 절대적인 건 없다. '회사에서 입어도 괜찮을 만한 옷'에 대한 생각도 변하기 마련이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그리고 50년 전, 각자의 시대나 상황에 따라 '괜찮을 만한 옷'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는가. 이런 변화는 그저 자연스럽게 진행된 게 아니다. 크고 작은 '당황스러움'속에서, 혹은 이런저런 '논쟁'을 거치면서 이뤄졌을 거다. 그때마다 약간의 다툼과 갈등은 있었을 테고, 더 '괜찮은' 방향을 찾기 위해 저마다 노력했을 거다. 




다만 너무 싸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어느 정도 상대방의 생각과 의견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5초만 기다려주면 좋겠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다툼이 아닌 건강한 논쟁으로, 맹목적 비난이 아닌 합리적 의견 제시로, 더 나은 문화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전 02화 신입이 인사를 안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