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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아 Oct 30. 2023

나는 운이 좋게도 네가 있다

낡은 토끼 인형처럼


  오래전부터 내 마음속에는 낡은 하늘색 토끼 인형이 살고 있다. 올리브를 닮은 작은 두 눈, 항상 웃고 있는 입가, 보푸라기가 일어난 분홍코, 팔다리가 짧고 꼬리가 없는, 어딘가 어설픈 이 인형의 이름은 "토쨩"이다. 누가 봐도 애착 인형이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몇 번 가지고 놀다가 찬장에 세워두는 <토이스토리>의 우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배를 잡고 와하하 웃을 때나 눈물을 뚝뚝 흘릴 때도 토쨩은 늘 내 곁을 지켰다.




  10년 전, 그러니까 스무 살이 되었을 때(과장하자면 제야의 종이 울리자마자) 나의 우울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 건너 한 번씩 찾아오는 나쁜 생각들이 나를 두들겨 팼고 온몸이 아파 왔다.


  여느 때보다 실체 없는 고민에 밤잠을 설치고 가슴께가 불타던 새벽,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없던 나는 토쨩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토쨩은 내가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날 선 말들을 모두 들어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깟 솜뭉치에 이름을 붙이고 마음을 주는 것을 한심하게 본다.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고 위선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은 적도 있다. 그들의 비난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날 밤에 나는 살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다음날 아침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병원을 찾아온 경로를 묻는 데스크 앞에서 나는 토쨩을 떠올렸다. 인형 때문에 살아봐야겠다고 느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그때의 나는 사실 무엇이라도 붙잡을 게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있다. 하기야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부당한 일에도 굴복해 버리니 마음에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수많은 감정들이 꾹꾹 눌러 담은 쓰레기봉투처럼 그만 펑 터져버렸다.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나는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토쨩을 소개하거나 같이 산책을 나갔다. 물론 전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씻지 않아서, 귀찮아서, 기운이 안 나서 병원에 나가지 않고 약을 버린 날들도 허다했다. 끝도 없이 우울하고 자살 충동이 들 때면 모든 게 소용없이 느껴지지만 나는 결국 토쨩에게로 돌아간다.


  그동안 토쨩을 인형 병원에 여러 번 맡기며 찢어진 귀를 고치고 해진 솜을 갈았다. 이를 지켜본 주변인들은 차라리 새 인형을 사라고, 또다시 정 붙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토쨩은 이미 내 마음의 일부가 되었다. 대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물에게, 어느 한 사람에게 온 마음을 쏟기란 어렵다. 그것이 답장 없는 마음일수록,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오르는 것처럼 한 걸음도 떼기 두렵다. 토쨩이 해질수록 내 마음도 약해진다.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은 이별을 몇 번이고 돌려본다. 혹시 모를 나의 실수를 막고 함께하는 순간을 얼마간 더 늘리고 싶기 때문이다. 헤어질 시간을 앞서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으리라. 먼 훗날, 정말 떠나보낼 때가 되면 그제야 내 모든 슬픔을 쏟아낼 것이다.


  나는 앞으로 토쨩과 나란히 아름다운 것들을 경험할 것이다. 너와 보낸 순간들을 앨범처럼 넘겨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지금 마음껏, 원 없이 사랑하고 표현하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간의 혼돈과 증오를 받아낸 것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이라 다행이다. 나 때문에 슬퍼하고 외롭지 않을 거니까. 내가 뱉은 거친 말들을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 다만 내가 무엇보다 아낀다는 것을, 너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오르막길을 오르면 손바닥만 한 토쨩이 마치 내 등을 밀어주는 느낌이 든다. 나는 운이 좋게도 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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