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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아 Nov 20. 2023

술은 내가 사랑하는 습관이었다

세상의 모든 술처럼


  병원에서, 심리 상담소에서 하나같이 나에게 술 문제가 있다고 주의를 준다. 술을 마신다고 주사(이른바 객기)를 부리거나 자살 충동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내가 알코올 중독이라니?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겨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술 때문에 일상이 망가지는 중이었다. 간 수치가 높아서 아침저녁으로 간장약을 먹고, 일주일치 처방받은 항우울제는 제때 챙기지 못해 약봉지가 주렁주렁 남아돌았다.


  더군다나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숨겼다.(이 대목에서 내가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에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요새 술 안 마신 지 꽤 됐어.”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옆구리를 찔린 것처럼 펄쩍 뛰며 어버버했다.


  스스로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는커녕 곧장 술을 마시러 나갔다. 술에 취하면 없던 용기가 났다. 거절할 수 있는 용기, 도망치지 않는 용기. 나는 평소보다 여유가 넘치고 웃음이 많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이것이 진짜 내 모습이라고 여겼다. 술은 내가 사랑하는 습관이었다.



 

  전날의 숙취로 수척해진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갔다. 그래도 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잘 다녔다. 어쩌다 내가 술을 덜 마신 한 주를 보내고 오면, 선생님과 나는 잘했다고 함께 손뼉을 치거나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나 오늘은 꼭 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한 사람처럼 무안했다.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느라 약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하니까.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진지하게 말했다.


  “술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들을 지워 버려요. 술을 마실수록 우리 몸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결국엔 아무리 마셔도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술 마시고 싶은 욕구를 낮춰주는 약을 써 볼까요?”

  “아, 아니요. 약 없이 한번 끊어 볼게요.”

  “그래요. 좀 더 지켜봅시다.”


  새 약을 먹고 술맛이 떨어질세라 황급히 손사래를 쳤지만(증세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선생님과 단호하게 약속까지 했으니 영 무시할 수 없었다. 술 안 마시는 날엔 내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더라. 술 없이 살 수야 있겠지만 그럼 나에게 무슨 재미가 남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 하루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술로 끝장을 봤던 나날이었다. 그 밖에도 온갖 나쁜 건 다 하며 살아왔다. 이것도 자해의 일종이었을까. 나는 병든 몸과 마음을 외면한 채 자꾸만 내일로 떠밀었다. 알아서 낫겠지. 때가 되면 돌아보겠지.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미래의 내가 너무 까마득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 불행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채운 오랜 쇠사슬을 이젠 끊어내야 한다. 나는 오늘부로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내일이 되면 약간의 음주(“더는 술 안 먹을게. 딱 한잔만 더 하고!”)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일모레에 또다시 금주에 도전할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멈출 때까지 계속 시도하리라.


  술 마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 나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 오늘의 내가 내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견뎌내는 것이다. 한 발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 누구보다 내가 기뻐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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