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가족처럼
그날은 기말 시험을 치고 학교가 일찍 끝난 날이었다. 집 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건너편에 언니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지? 같이 점심 먹기로 했는데. 나는 언니가 이쪽을 볼 때까지 훠이훠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언니는 모르는 사람인양 나를 외면했다.
초록불이 떨어지고 우리가 횡단보도를 절반쯤 지났을까. 나와 마주한 언니는 순식간에 내 얼굴을 후려갈겼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올라가던 언니의 손. 분노가 불처럼 번진 것처럼 붉어진 내 뺨. 언니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신호는 끝나가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쪽팔리니까 울지 말자. 티 내지 말고 이것만 건너자. 집은 도저히 못 들어갈 것 같아서 놀이터에 갔다. 입 안에서 피맛이 맴돌고 맞은 자리는 부어올랐다. 흥분이 가시질 않아서 계속 숨이 찼다. 나는 이 모든 게 사그라들 때까지 시간을 죽이고 죽였다. 앉은 그네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아까 전의 일은 그만 떠올리고 싶은데 언니는 나를 붙잡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네가 '맞을 짓'을 했으니 억울해하지 말라고. 언니가 먹고 싶다던 과자를 하굣길에 사 오지 않았다는 이유, 단지 그 때문에 볼이 터지도록 따귀를 맞은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언니는 말을 하지 않는 내가 답답했는지 또다시 앙심을 품었다. 평소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방 안이 난장판이었다. 언니는 내가 아끼는 담요를 찾아 버리고 가스레인지 불에 인형을 태워서 보란 듯이 침대에 던져두었다.
그때만큼은 자존심이고 평정심이고 다 필요 없었다. 나는 반쪽만 남은 인형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언니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언니는 내가 비위를 맞추지 않아서, 괜한 오기를 부려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정말로 나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 심산이었다.
살기 위해 언니 눈치를 봐야 했다. 언제 어디서 상식 밖의 행동으로 보복할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일상을 보냈다. 언니가 눈앞에 없어도 불안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걱정되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지옥보다 못한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리라.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11월의 어느 날, 한동안 잠잠하던 언니는 심심한지(이것밖에 설명이 안 된다.) 나를 구석으로 몰기 시작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온 나에게 밤늦게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는지, 발랑 까졌다느니 차마 듣기 힘든 폭언이 쏟아졌다. “애새끼가 말을 안 들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욱하는 마음에 말대꾸를 했고, 언니는 부엌 가위를 가져와 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잘라냈다. 그때 언니의 손아귀에서 분명한 살기를 느꼈다. 나는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우며 일말의 희망을 내려놓았다. 언니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언니와 나는 8살 터울이다. 그녀는 늦둥이로 태어난 나를 심하게 질투했다고 한다. 내 기저귀 위에 오줌을 싸서 바닥을 흥건하게 만들고 내가 쥐고 있던 딸랑이를 빼앗으려다 팔을 빠지게 했다. 내가 태어나서 언니가 불행해졌을까. 그래서 벌을 주는 것일까.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언니를 통해 깨달았다. 그럼에도 어렸을 적의 나는 언니 눈에 들기 위해 방을 청소해 놓고,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반듯이 올려두었으며, 언니가 올 때까지 저녁을 안 먹고 기다렸다. 나는 우리 언니를 참 좋아했다.
주변에선 우리가 든든하고 끈끈한 사이일 거라 부러워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기억에 없는 유년 시절부터 크고 작은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언니에게 받은 상처는 나에겐 치욕스러운 비밀이었다. 가족이니까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한다고. 그러나 끝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나의 언니는 잔인한 사람이다. 사과하지 않는 사람이다. 언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나를 혐오한다.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 일어나선 안 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오랫동안 겪었다. 가정 폭력은 관계를 끊는 것밖에 탈출구가 없다. 생판 모르는 남보다 못한 가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나는 마침내 언니와 절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