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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아 Jan 15. 2024

우울증 환자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마주 보는 마음처럼


  나는 한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다.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이토록 강렬히 끌린 적이 있던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 그 사람의 눈빛, 음성, 손짓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는요, 그쪽이 마음에 들어요.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니까 알아만 주세요. 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그는 불쾌하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처음 모습 그대로 차분했다. 우리는 다음 날 약속을 잡고 다시 만났다.


  첫인상 때 느꼈던 것처럼 그는 과묵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모든 걸 조심스러워했다. ‘우리’는 묵묵히 카레를 먹고 충무로 극장에서 〈라라랜드〉를 봤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그가 내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고(전혀 근거 없는 생각이었다.) 스크린에 집중한 그의 모습을 자주 흘깃거렸다. 나는 이 감정을 사랑으로 만들고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그 사람과 해가 저문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바깥은 한파가 몰아쳤다. 시간은 바람처럼 빠르게 빠르게 흘러 어느새 두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찬바람을 하도 맞아서인지 머리가 뎅뎅 울리기 시작했다. 목적 없이 계속해서 걸어가는 건 더 이상 무리였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눈이라도 내렸으면. 그 사람과 밥도 먹고 영화도 봤는데 이젠 같이 눈도 맞고 싶어.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요. 그때 그 사람은 꽁꽁 얼어붙은 내 손을 붙잡고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내내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 지내는 순간만큼은 밝고 명랑하게 지내고 싶었다. 나는 처음으로 병을 원망했다. 왜 하필이면 나야. 이유 없이 축 늘어지고 가라앉으면 기운을 찾으려고 나 자신을 세게 내몰았다. 부정한 기운을 뻗쳐선 안 돼.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재채기처럼 우울증은 가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에 나는 털어놓았다. 저는 마음의 병이 있어요. 그래서 약을 먹고 있는데 언제 나을지는 모르겠어요. 자주 지치고 우울하고 죽고 싶고 이러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이제와 말해서 미안합니다.


  내 말을 듣고 부담되어 그와 이별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고 다짐했다. 어차피 그 사람 역시 칙칙한 나를 바꾸려고 애쓰다 제풀에 지칠 거였다. 언제든 헤어지면 그만인 사람, 이라고 되뇌었지만 미련은 덜어지지 않았다. 나의 고질적인 병 때문에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 덕분에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보냈으니까.


  그는 결국 떠나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밤늦게 공황이 찾아와 내가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이면 그는 놀이터로 데려가 숨통을 열어주었다. 약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회의감이 들 때도 그는 아침저녁으로 나의 우울증 약을 대신 챙겼다. 그렇게 당신은 7년째 내 곁을 지키고 있다.


  그대는 내 볼을 자주 꼬집는 사람. 발끝까지 이불을 빈틈없이 덮어주는 사람. 내 이야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사람. 내 기분에 따라 당신의 마음도 좌지우지되는 사람. 어디를 가든 내 손부터 잡는 사람이다.


  만일 거꾸로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남들보다 우울하고 느린 당신을 기다려줄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모든 걸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느냔 말이다. 나는 한 사람의 숭고한 사랑을 경험했다. 우울증 환자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다. 일상 속 작은 행복도 크게 느낄 수 있다. 그 사람 덕분에 내 세계가 이처럼 넓어졌다. 삶의 의욕과 희망이 사라질 때마다 나는 떠올린다. 그와 보낸 꿈같은 시간들이 여전히 이곳에 반짝이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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