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비상구처럼
우울증 약은 약효가 바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매일 챙겨 먹어야 하고, 최소 3개월은 복용해 봐야 한다. 마치 화초에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생장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를 아는데도 나는 번번이 약을 걸렀다. 아침저녁으로 7알씩 먹는 게 부담되고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약을 기피하는 것도 병증일지 모르겠다.
우울증은 막연한 병이다. 어떻게 우울한지, 언제 불안한지, 왜 죽고 싶은지 답이 없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항우울제는 감기약이나 비염약처럼 즉각 반응하지 않는 탓에 기다리다 지치기 십상이다. 먹어도 먹어도 반응이 없다. 나와 맞는 약은 더이상 없다는 극단적인 패배감을 느꼈다. 연료를 아무리 채워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고물 자동차 같았다.
이 시기에 나는 점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우울에 가려진 진짜 내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당이 무엇이 궁금해서 찾아왔냐고 물으면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내가 지나온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면 잠깐이나마 속이 후련했으니까.
어떤 위로나 격려를 받지 않아도 충분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무당이 되어야 한다거나 단명할 '팔자'라고 했다. 자살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니 일찍 죽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무속인이 되면 신명 나게 춤을 추고 부지런히 기도터에 다녀야 할 텐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기력이 없지 않은가.
10만 원을 주고 한 시간 동안 점사를 보는 대신에 심리 상담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상담사는 나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았다. 내담자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내 마음이 전보다 편안해지는 걸 목표로 삼는다. 검증된 검사지를 통해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상담을 받으며 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어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반년을 보냈고. 지금은 죽어야 끝날 거 같은 불행이 눈 녹듯 사라지고 봄볕에 싹이 올라오듯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다. 지난한 하루하루였지만 그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울에서 벗어난 이 순간이 천천히 지나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언제 다시 우울할지 알 수 없으니 오늘의 기분, 이 느낌을 기억해야만 한다. 스스로 쓸모없다 여기며 죽고 싶어 하는 나에게 이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나는 끝없이 들려주리라.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삶에 의미를 두지 않아도 새삼 느껴지는 생의 아름다움은 소중한 거라고. 어둠을 이겨내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