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뮤지엄>이 던지는 질문, 의식 복제 시대가 탄생한다면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시리즈 중 에피소드 〈블랙 뮤지엄〉 은 섬뜩한 상상 하나를 제시한다.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화하여 다른 사람의 뇌나 기계 속에 이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복제된 의식은 과연 나를 대신할 수 있을까?
이야기 속에는 아내의 의식을 자신의 뇌에 이식한 한 남자가 등장한다. 처음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하나의 몸에 두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아무리 부부일지더라도, 같은 몸에서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서로 다른 두 의식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래의 몸의 주인인 남자는 결국 아내의 의식을 사물로 옮기는 선택을 하게 된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의식의 이전은 의식의 ‘복제’ 또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복제된 의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라는 생각을 이어서 하게 되었다.
이전 글에서 복제 인간에 관해 고민했을 때, 내 복제 인간이 탄생한 순간 나는 그 복제인간은 ‘내’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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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던졌던 질문 중 하나는 우리의 ‘자아’가 과연 ‘기억’에 의해서만 정의되는가였다. 나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 무한 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자아는 *'보는 자'이며 내 육체와 정신 안에서 다양한 것들을 관측할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은 육체를 통해 보았던 것들과 정신을 통해 느꼈던 것들이 머릿속에 저장된 것이기 때문에 자아를 통해 저장된 '데이터'라는 게 내가 그의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었다.
(*채사장은 저서 내에서 '보는 것'을 시각적인 보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언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적합한 단어를 ‘본다’로 택했을 뿐, 실제로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내/외부의 모든 것들을 ‘관측’하는 것이 의도한 의미에 가깝다. 나는 본 글에서 ‘보는 것’을 그의 저서에서와 같은 의미로 쓰려고 한다.)
다시 복제 인간으로 돌아와서, 내 복제 인간은 지금까지의 내 기억과 감정, 사고방식까지 똑같이 복제하여 갖고 있는 존재겠지만,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와는 다른 것들을 보고 경험하게 될 개체이다. 즉, 그의 안에 있는 '보는 자'는 내 안의 '보는 자'와 다른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그는 나라고 불릴 수 없다. 그가 나처럼 웃고, 내가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내가 소중히 여겼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해도, 새로운 육체와 정신이 생긴 그는 나와 다른 것을 보며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블랙 뮤지엄>에서 의식을 이식하고 복제하는 소재를 다룰 수 있었던 이유는 의식을 단순히 '데이터'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USB에 저장된 파일을 다른 컴퓨터에 복사하듯, 의식 또한 옮기고 복사할 수 있는 무언가로 다룬 것이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의식은 소유물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의식은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핵심이며, 그 자체로 유일무이하다. 의식은 나를 나이게 한다.
복제된 의식이 나와 동일한 기억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나와는 다른 존재다. 우리는 같은 출발점에서 갈라진 두 개의 선처럼, 점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나를 알고 있을 수는 있지만, ‘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서로가 ‘보는 것’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를 복제한다는 개념은, 곧 ‘나’라는 정체성을 파편화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이런 상상을 조금 더 확장해 보자. 만약 미래에 의식 복제가 일반화된다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기술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될까? 그 복제품이 내 자리를 대신해 살아가도록 허락할 수 있을까? 이건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나는 앞서 복제된 존재가 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분리된 그 순간부터, 나와 다른 것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근거였다. 그렇다면 ‘내’가 없어지고 복제된 존재만 남는 다면 어떨까? 그는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기억들을 갖고 있고,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를 동일하게 갖고 있으며,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또한 내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유일한 위의 유산을 물려받은 유일한 ‘보는 자’가 된다.
지대넓얕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보는 자’는 육체에 국한되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복제 인간은 나와 다른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다른 ‘인간’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닌 복제 인간이다. 또한 내 육체가 사라짐으로 인해 위와 같은 존재는 복제 인간이 유일하다. 그리고 아마도 타인이 필요로 하는 ‘나’는 육체를 가지고, 생각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나를 대체할 수 있게 된다.
기술은 어쩌면 조만간 인간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저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을 복제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데이터가 복제된 존재와 나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구분할 수 없다. 정확히는 ‘나’는 구분할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구분할 수 없다. 불행히도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의식은 유일할지 몰라도 사회적인 ‘나’는 여럿이 될 수 있다. 즉 현재의 '나'는 내 의식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 친구 무리 구성원으로서의 '나', 회사의 일원으로서의 '나'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내가 겹쳐진 존재이다. 그렇기에 복제된 존재는 새로운 의식과 나의 기억을 가지고 사회적 내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나는 유일할지 몰라도, 사회는 점점 더 복제된 ‘나’를 편리하게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
미래의 어느 날, 나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가 나 대신 사람들과 웃고,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나의 의식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인간을 복제한다는 건 원래의 존재를 철저히 파괴하는 과정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