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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미인 앨리 Jul 03. 2023

돼지책

< 살림은 함께 하는 것! >


"큰 딸은 살림 밑천", "딸은 살림 밑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관습적인 말 중 하나이다.

흔히 한 가족의 장녀(외동딸)라면 "큰 딸(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들었던 말이고 정말이지 싫어하는 무거운 말이다.

한국은 아직도 가부장 제도가 심하고 아들 중심 문화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21세기에 조금씩 변화가 있지만 그래도 저 밑에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살림이란 무엇일까?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살아가는 형편이나 정도 등을 말하며 비슷한 말로는 가계, 경영, 관리이다. 한마디로 집안을 잘 경영하는 의미다. 

그럼 살림 밑천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살림의 주인은 밑천을 들여서 살림을 키운다고 의미로 그 주인 자리는 아들을 위한 것이다. 즉, 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은 살림을 일으킬 사람을 못 얻어 섭섭한 사람에게 밑천이라도 얻지 않았느냐고 위로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전부터 딸들은 실제로 살림 밑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왔다.


요즘 K-장녀라는 유행어가 있다. K-장녀는 Korea의 앞 글자 'K'와 맏딸을 의미하는 '장녀'를 따와 합성한 유행어다. 주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감정적으로 억압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을 의미한다. 장남인 아들 등 맏이에게 지어졌던 부담과 함께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역할까지 추가됐다. 주로 부모를 부양할 책임도 지면서 '여자답게' 살가운 모습으로 부모를 대해야 한다는 정서적인 측면까지 추가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K-장녀 유행어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에는 살림 밑천이라는 말은 자주 하지 않지만 아직까지 곳곳에서 차별이 드러난다. 아들과 딸에게 거는 희망이 다르며 아직까지 사근사근한 딸, 애교 있는 딸을 요구하는 부모가 많은 반면에 애교 있는 아들, 양보하는 아들을 요구하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에서는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역할을 그린 '중전' 캐릭터는 여성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로 맏이에게 요구되는 책임감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 아래서 요구되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부담까지 함께 지어진다.

실제로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 등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책임감은 남성보다 훨씬 더 높게 지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집안 살림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맡겨야 일이 잘 풀리다는 말은 여성을 추켜세워주는 듯 하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집안 일만 잘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가 바뀌었고 아주 조금씩 사회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살림은 오로지 여성만이 하는 것으로 된 프레임 속에서 '살림하는 남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길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여성이 사회 일을 한다고 해도 집으로 돌아오면 살림하는 여자로 돌아간다.

남편이 살림을 도와준다고 하나 솔직히 아내만큼 하는 것은 아니다.

살림은 여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다. 딸을 가진 입장에서 모든 아이들이 공평하게 정규과정 교육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주길 바라지 않는다.

한 번씩 친정 엄마가 오면 "에고! 네 살림인데 왜 이러고 사냐!"라고 잔소리하지만 나름 살림을 잘 꾸린다고 생각한다. 남에게 보여주는 살림이 아닌 내가 생활하기 위한 살림으로 지내면 그만이지 않을까.

아무리 가부장제라고는 하지만 조금씩 사회에 대한 잘못된 관습이나 프레임에서 벗어나 현명하게 살 필요가 있다. 살림은 아내, 엄마 혼자가 아닌 온 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





앤서니 브라운이 쓰고 그린 << 돼지책 >>그림책에서 가사노동, 살림에 대해 독자에게 말한다.

가사노동과 살림은 오로지 엄마, 아내에게만 지워지는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돼지' 동물에 빗대어 잘 표현한 사회 풍자 그림책이다.



- 2001년에 출간 된 << 돼지책 >> -
- 20주년 출판 << 돼지책 >> -


분홍색 바탕에 프레임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표정의 엄마 등에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남편과 아들 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엄마, 아내 혼자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일인 살림을 도맡아 하는 모습에 격하게 공감하며 책장을 넘긴다. 

매일 아침 출근과 등교하기 전 남편과 아들들은 "엄마"를 연속적으로 부르며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남편은 큰 신문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 크기만큼의 신문 속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림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에 반해 엄마 얼굴에는 표정이 없으며 전체적인 책 또한 어둡다. 남편과 아들들이 나가자 엄마는 집안일을 정리한 후 일하러 나간다. 다시 남편과 아들들이 집에 오면 늘 그렇듯 "엄마"를 부르며 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는 집안일은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오로지 집안일, 살림은 엄마 몫이었다. 엄마는 또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일한다. 


"너희들은 돼지야."

참다못한 엄마는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가버린다.

아내, 엄마가 집에서 사라지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독자은 상상할 수 있다. 집에 엄마가, 아내가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과연 남편과 아들들은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까?



주부라면 통쾌해지는 장면이다. 엄마가 아내가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아주 재치 있게 잘 표현한 그림책이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는 보여주는 반전(엄마의 다른 모습)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살림은 더 이상 여성의 몫이 아니며 성 역할을 떠나 가족이라면 함께 이루어야 하는 것임을 이제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부터 고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지만 아이들 세대에서는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사라질 것이다. 집안을 잘 경영하려면 엄마, 아내 혼자가 아닌 온 가족이 함께 도우며 이끌어야 한다.

살림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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