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순도 백 퍼센트의 존재에게

by 임이안

짧은 여행을 다녀온 후, 지민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 같았다.

무슨 아르바이트인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딘지 낌새가 그랬다. 현관에 버켄스탁 슬리퍼 외에 지민이 회사 다닐 때 신던 흰색 로퍼가 놓여 있는 날이 늘었다. 흰색 바지에 흰색 로퍼는 지민의 '출근룩'이었다. 적어도 가장 최근 직장생활을 할 때 목격한 모습은 그랬다.

지민은 내가 퇴근하면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아서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어디 다녀왔어? 요즘에 어디서 일 시작했어? 물으면 대충 얼버무리며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은 건, 요즘 지민이 저녁을 차려주기 시작했는데 음식이 의외로 맛있기 때문이다. 내가 최근 저녁을 매일 챙겨 먹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계기는 지민이 만들어준 계란말이가 맛있어서 그 맛을 칭찬하며 남김없이 먹었더니 이후 지민은 며칠 연속으로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지민이 만든 계란말이는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오래전 학생 때 맛있는 카레집을 발견하면 매일같이 둘이서 그 집에 가서 카레를 먹은 이력이 있는 터라, 암묵적으로 우리는 둘 다 한 가지 음식을 며칠이고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서로의 공통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루는 크래미, 하루는 아메리칸 치즈, 하루는 김, 속재료만 바꿨는데 매번 맛있어서 나는 매일 칭찬하며 지민의 집밥을 먹었다.

그날도 어딜 다녀왔는지 인디언 핑크 톤의 아이섀도에 같은 계열의 립스틱을 바른 지민은 거대한 키티 얼굴이 달린 집게핀을 머리에 꽂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른 저녁을 먹어 배부르다며 한참 맛있게 밥을 먹는 나를 엄마처럼 쳐다보더니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냈다.


"있지, 우리 팀에 책임감 강한 대리가 하나 있었어."


"책임감?"


퇴근하고 듣는 '책임감'이란 단어는 일터를 연상시킨다. 얘가 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지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계란말이를 집었다.


"응. 책임감. 자기가 맡은 업무는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하던 애야. 대리급인데 소통도 잘해, 일처리도 신속해, 뭐든 마감 기한을 잘 지켜서 정말 나무랄 데 없었거든. 보고 있으면 과거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내가 대리일 때 얼마나 형편없었나 돌아보게 된다니까. 뭐, 난 이미 대리 시절을 다 거쳐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받은 포인트는 책임감이었던 것 같아. 심지어 문제가 생겨도 짜증을 내거나 푸념을 늘어놓거나 한숨을 쉬거나 하는 것도 없었어. 대단하지 않니? 아주 차분하게 해결책을 가져와서 조언을 구하더라니까."


지민은 정말 대단하지 않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며 동의를 구한다.

"뭐, 대응하는 건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니까."


너무 그렇게 비교하지 말라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뭐 별별 방식이 있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음식과 함께 삼킨다.

"근데 그런 완벽한 애가 말이야, 퇴근길 교통사고로 떠났어."


"응?"


누군가 힘껏 던진 공에 등허리를 맞은 기분으로 지민을 바라본다. 지민이 두 눈을 부릅뜨자 이마의 얇고 창백한 피부가 겹쳐 주름이 생겼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과속하는 차에 부딪혔대. 아직 삼십 대 초반이었는데 너무 허망하게 갔지.”


"세상에, 언제 있던 일이야? 전에 다니던 그 회사?"


"거기 말고, 그전 회사."


"프로젝트 여럿 돌리던 그 바쁜 회사구나."


"응, 그 회사. 그 애가 떠나고 말야. 머릿속 퓨즈가 끊긴 느낌이었어. 퓨즈가 끊기면 전기가 나가잖아. 머릿속이 엉망인 거야. 뭘 해도 집중이 안되고.

우리 팀 단톡방에 그 애가 마지막으로 올린 메시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정보가 담긴 링크야. 그다음주가 우리 팀 회식이었거든. 그 애가 맛집을 많이 알고 있어서 자신의 추천 리스트를 공유해 줬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 애 팀장이었잖아. 내가 그 애에게 마지막으로 한 얘기는 마감일을 준수해 달라는 당부였어. 일정에 변동이 있었는데, 내가 그 애에게 신신당부했더라. 왜 그랬을까. 매번 칼같이 마감을 잘 지키던 애였는데. 왜 그렇게 쓸데없는 당부를 했을까. 매번 잘 해내는 구성원이니까, 그런 말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안 그래? 다른 말을 해줄 수 있었을 거야. 한결같은 모습을 칭찬할 수도 있고, 아니면 따뜻한 차 한잔이라도 더 사줄 수 있고. 매번 고마운 대리님, 내가 커피 사줄게요 뭐 이런 얘길 할 수도 있잖아. 당부 말고 다른 걸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두 눈은 어딘지 피곤해 보였고, 흐린 눈빛은 내가 아니라 먼 곳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종교는 없지만 그 애가 다녔다는 교회에 팀원들과 다 같이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팀원이 다닌다는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주말에 고모가 있는 절에 가서 기도하고, 당시에는 기도를 많이 했어. 특히 미안했거든.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마감일 지켜달라는 신신당부였다니. 아마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마음에 습관처럼 튀어나온,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당부겠지."


지민은 이어 그 애와 다시 조우한 날에 대해 얘기했다. 그날 지민은 아침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서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층고가 높고 넓은 사무 공간은 고요했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걸어가다가 회의실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지민의 소속 부서가 나온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공기, 특별할 것 없는 이른 아침, 지민은 소스라치게 놀랄 뻔했다. 그 애가 평소처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자리에 앉아 있다. 지민을 보더니 역시 평소처럼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팀장님, 일찍 오셨네요? 저희 오늘 회식하는 날이죠?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어요. 거기 외부 와인 반입이 가능하대요. 그래서 그때 얘기한 맛있는 와인 가져왔어요.'

그 애는 한 손으로 뭔가 들어 보였는데,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있지 않다. 여전히 상기된 눈빛으로 지민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팀장님, 제가 제출한 거 보셨죠? 마감일이 변경돼서 정말 혼신을 다해 빠르게 마무리했어요.'

그러더니 자리에서 총총히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정말 그 대리였어? 꿈꾼 건 아니고?"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똑똑히 기억해. 무채색 사무실 한편에 그 애가 단아하게 차려입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어. 간절기에 자주 입던 검은색과 은색 실이 섞인 트위드 소재 재킷을 걸치고. 그 모습이 매우 생생하면서도 슬픈 건 말이야,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회사에는 오지 말지, 회사에 왜 왔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한 당부 때문에 그 일을 끝내려고 왔을까. 어쩌면 책임감이라는 건, 설령 육신이 지구를 떠나더라도 마음에 밟히는 게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 끝까지 수행하게 만드는 그런 마음가짐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세찬 직구에 맞은 것처럼 등허리가 아프다. 나는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지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있지,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 애가 백 퍼센트의 선명함으로 생생하게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기억하는 게 내가 할 일이 아닐까. 그 이후로는 그 애를 생각하며 혼잣말을 했어.

내가 기억할게. 넌 순도 백 퍼센트로 멋지고 예쁘고 사려 깊고 최고야. 최고의 동료이자 최고의 지구인이었어. 네가 추천한 곳에서 회식을 했어. 추천해 준 와인도 마셨는데 정말 맛있었어. 고마워. 미리 얘기 못해서 미안해. 그때 진심으로 고마웠어.

그거 알아? 그렇게 기억할수록 어디선가 그 애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 같거든.”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08화지민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