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는 서로 바빴다. 나도 귀가가 늦었지만 지민은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올 때도 많았다. 둘이서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일도 한동안 하지 못했다. 주말은 주말대로 나는 사촌 결혼식 참석으로 지방을 다녀오거나 지민 역시 오랜만에 오빠가 한국에 오면서 모처럼 가족 회동으로 바쁜 것 같았다.
그렇게 각자 한 달을 보낸 후 맞이한 주말 아침,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지민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양볼은 초췌하게 파였지만 눈빛은 전구에 불을 켠 듯 또랑또랑했다. 언제나처럼 머리를 정수리 위에 틀어 올렸는데 그 모습에 나는 그만 흠칫 놀랐다. 오른쪽 이마 위쪽의 머리카락 일부가 아예 소실돼 있었다. 살색의 두피가 그대로 드러나있다. 마치 뷔페의 케이크 진열대에서 누군가 갓 새로 준비된 티라미수 케이크를 가운데부터 파먹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케이크의 가운데 빈 공간이 너무 크고, 당당하게 중앙부터 비어 있어서 이게 뭘까, 잠시 놀라게 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커피 마셔?”
한 달 여 만에 서로 얼굴을 마주했지만 마치 같이 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지민은 내 얼굴을 보며 자신의 컵을 내밀었다.
“나도 라떼 한 잔 타줘. 내가 어제 우유 사 왔어. 장을 안 봤더니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더라.”
커피기계의 스팀기로 우유를 데우는 사이, 그 시끄러운 스팀 작동 소음 사이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줄곧 말을 이어가는 통에 나는 스팀기계를 멈췄다.
“하나도 안 들려.”
지민은 어딘지 즐거운 눈빛이었다. 두피가 훤히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잃은 일이 지민에게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거나, 이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것인지 궁금했다. 한 달 전에는 탈모 같은 게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증을 감추고 지민에게 커피가 든 잔을 내밀었다. 우유 거품이 머그잔 위로 동산처럼 솟아 있었다.
“별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동안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도 있어. 뭐부터 듣고 싶어?”
“나쁜 일? 많이 안 좋아?”
나쁘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아니. 그건 나한테만 해당하는 나쁜 일이니까 넌 걱정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나 원형 탈모 생겼어. 발견한 지 한 달 됐나?”
지민은 머리카락 없이 쓸쓸해 보이는 두피를 매만지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잠옷 가슴팍에 꽂은 봉투를 내게 건넸다.
“이건 너에게 좋은 일. 그간 밀린 월세야.”
지민은 덧니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아니, 밀린 월세를 내고 그럼 이제 방을 비운다는 뜻일까? 순간적으로 마음에 지민의 머리처럼 휑뎅그렁한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당장 내가 살 집을 구한 건 아니야. 조금만 더 신세 질게. 그리고 나한테 좋은 소식이 또 있는데.”
지민은 다시 훤히 드러난 두피를 매만졌다. 머리카락을 잃은 부위는 상당히 넓었다. 성인 손바닥의 3분의 2 정도 크기로 조금 더 넓어지면 반대편 머리카락으로 가리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다행히 더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거야.”
지민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답했다.
“처음에 우연히 탈모 발견했을 땐 가슴이 정말 철렁 내려앉았어. 소스라치게 놀라서 병원을 달려갔는데, 주사 두 번 맞고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특히 모낭주사가 너무 아파서 이렇게까지 해서 머리카락을 자라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기를 쓰고 머리카락을 되찾아야 해, 뭐 그런 마음도 들지 않고. 그냥 그 주사가 너무 아픈 거야.
병원에서는 탈모 지점이 이마와 연결된 부위고 진행도 많이 된 상태라 더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주사 두 번 다시는 맞고 싶지 않고. 탈모 부위가 더 넓어지면 삭발을 할까, 그런 생각을 했어.
너도 알지, 나 예전에 숏커트도 했잖아. 사실 그때 잘 어울린다고 얘기해 준 사람은 아빠뿐이었지만.”
그건 숏커트가 아니고 스포츠머리에 가까웠다. 지민의 강인한 턱과 우뚝 솟은 잘생긴 코가 부각돼 어딘지 중성적인 느낌도 풍겼다. 지민이 그 머리를 했던 건 이유가 있었는데 뭣 때문에 그렇게 머리를 삭발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고, 남자 중학생처럼 까끌까끌한 목덜미를 만져본 기억이 났다.
“그때 내 머리를 본 아빠가 놀라지도 않고 잘 어울리네, 예쁘다고 했어. 머리가 짧으면 관리가 되게 쉽다고 마치 머리를 길러본 사람처럼 얘기했지.”
커피를 홀짝이던 지민이 냉동실 칸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너도 먹을래? 어제 병원 다녀오다가 사 왔어.”
고개를 저었다. 흑임자가 들었다는 아이스크림은 회색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지민이 눈빛을 빛내며 또 물었다.
“내가 병원에서 누구 만났게?”
“첫사랑?”
사실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병원에선 누구든 만날 수 있다. 오래전 소개팅으로 두어 번 만났던 남자애를 안과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편이 더 편할 텐데 나는 이상한 면에서 기억력이 좋다. 아마도 흥미로운 인물이거나 개인적으로 추억이 있는 인물이거나 그 둘 다 아니고 그냥 옛날에 알던 지인을 만나도 지민은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질문했을 터다. 별로 애써서 답할 질문은 아니다.
내가 어쩌다 답을 맞혔는지 지민의 동공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 나 도훈이 만났잖아.”
“도훈이?”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도훈이는 산책로에 심은 길고 가느다란 나무를 닮았다. 턱이 뾰족한 얼굴에 무테를 쓰고 건축을 공부하던 애였다. 그 애를 생각하면 애처로운 팔이 생각난다. 여름이 되면 짧은 소매 아래 드러난 팔은 너무나 희고 깡말라서 2리터 생수병 하나 드는 것도 안쓰러워 보였다. 도훈이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을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애에 대한 지민의 마음은 아름다운 해바라기였다. 업무지구 한복판에 있는 8차선 도로변 화단에 홀로 우뚝 선 해바라기. 햇살에 빛나는 미모가 한눈에 띄지만 시종일관 매연 공세로 애처롭기만 한 해바라기.
“그게 말이야. 병원에 가족들을 데려왔더라. 부인도 있고 유치원생 애도 있어.”
“그래?”
처음 듣는 얘기였다. 물론 세월이 지났지만 지민이 워낙 열렬히 도훈이를 좋아했던 터라 혹시 싱숭생숭하진 않았나 싶었는데 오히려 지민은 웃고 있었다.
“여기서 좋은 일이 또 있어. 내가 도훈이와 결혼하지 않은 거.”
지민의 얼굴은 폭소를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다.
“아니, 그렇게나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니? 그렇게 배불뚝이 아저씨가 될 줄이야! 그 갸름하던 얼굴도 온데간데없는 거야.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데 감이 있잖아. 눈매나 콧날,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도훈인 거야. 설마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는데 접수대에서 이름을 부르더라고. 나처럼 탈모인가 봐. 이마가 많이 넓어졌어.”
그 말을 하곤 지민은 웃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도훈이와 안 만나길 잘했지! 걔 완전 귀공자였잖아. 근데 지금은 배에 뒷동산 하나 짊어지고 다니는 푸근한 아저씨야. 그 모습을 보는데 그냥 그동안의 내 로망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웃음이 나는 거야. 걔를 좋아했던 나한테 웃음이 나더라.”
엄밀히 말하면 도훈이는 귀공자보다는 피부가 희고 심한 저체중에 눈이 날카롭게 생긴 ‘범생이’ 인상이었다. 도훈이에게는 십 대 때부터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던 터라 엄밀히 또 짚으면 지민이 도훈이를 안 만나게 아니고 못 만난 것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웃고 있는 지민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이야, 도훈이 행복해 보이더라.”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지민은 냉장고에서 치즈 케이크를 꺼내 크게 두 조각을 자르더니 내게 묻지도 않고 한 조각을 내밀었다. 이후 한참 동안 케이크를 우물대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나는 쓸 수 있을 것 같아. 있잖아, 현실은 이미 환상이 깨어졌지만, 그동안 도훈이에 대해 여러 상상을 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워낙 좋아했으니까. 내겐 그 애의 모든 것이 반짝반짝 눈부셨거든.
복제된 우주에서 또 다른 내가 도훈이를 만나서 같이 사는 상상을 했어. 그 앤 우리 아빠의 말동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그 복제된 우주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살아있는 곳이야. 우리는 서울숲이나 불로뉴숲 같은 곳에서 다 함께 둘러앉아 식사할 거야. 그 싱그러운 녹음 아래 좋아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웃을 거야.
어쩌면 나는 그런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실제의 삶처럼 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게 내가 할 일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