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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May 13. 2023

그 계절의 닭백숙

결혼식은 겨울이었다. 만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남자와 결혼을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첫아이가 바로 찾아왔다. 신혼을 즐길 새도 없이, 17평 자그마한 집에는 임신기간 내내 여기저기에서 얻어온 아이의 물품들이 어느새 가득 채워졌다. 뭐든지 아끼고 궁상맞은 성격 덕분에 중고로 몇 가지 물품을 구매하곤 했는데, 그중에 특히 바운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시어머니께서 구해 오신 물건이었다. 당시에 나는 시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고, 단지 남편의 어머니이기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얻어주신 바운서는 아이를 눕히기에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이것을 사용할까 말까 고민을 하며 방 한구석에 치워두었다.    

  

배는 점점 불러왔고, 예정일이 몇 주 남지 않았던 무더운 8월의 일요일 아침에 갑자기 양수가 터지며 예상치 못한 출산을 했다. 아이는 우렁차게 울었지만, 미숙아였기에 바로 퇴원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34주는 위험한 주 수는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중환자실에 들어갔고,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들로 서울대병원에서 그렇게 생사를 오가는 시절을 보냈다.     


병원에 입원한 지  달쯤 지나자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추석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명절을 지낼 정신적 여유도 없었고, 하루 두 번 이루어지는 아이의 중환자실 면회를 위해 시댁에는 가지 못했다.

시어머니께서는 지방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셨다.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그녀의 한 손에는 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들께 드릴 떡이, 다른 손에는 커다란 보온 가방이 들려있었다. 지역에서 가장 맛있다는 떡집에서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떡을 들고 중환자실에 넣어 드리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감사하다는 생각보다 청승맞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울에도 예쁜 떡을 파는 곳이 많은데, 굳이 그런 걸 사 들고 온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아이가 아픈데 명절을 챙길 여유가 있을까 싶어 서운함이 앞섰다.

나는 아이의 생사를 지켜보는 엄마였고, 그녀는 할머니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보다 더 슬프다고 말했고, 세상에서 본인만큼 기구한 인생은 없다 했다.

 “내가 이 나이에 친정엄마도 돌아가시고, 이혼도 하고, 손자까지 보내게 생겼다.”

아이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엄마인 나에게 한다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졌고,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어머님, 어머님은 자식을 잃은 적은 없잖아요. 이 병원에서는 매일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울부짖어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법이라는 진부한 표현들이 실감 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나의 상처를 가장 크다고 생각하며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만신창이인 채로 살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보온 가방 안에는 닭백숙이 있었다. 아들 며느리 먹이려고 지방에서부터 끓여 들고 온 닭백숙이 쉴세라 어서 집에 가자며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자그마한 집 한구석에 놓인 바운서를 보시고 저게 무엇이냐며 물으셨다.

 “저렇게 지저분한 아기용품을 집에 들여놓으니 애가 아프지.”

나는 말문이 막혔고, 남편은 서둘러 “그거 엄마가 저번에 가져가라고 얻어다 준거잖아.”라며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머니께서는 겸연쩍어하시며 새 걸로 사자고 그걸 가지고 분리수거장으로 나가셨다.      

그 시절 젖이 돌면 눈물까지 같이 흘러나오던 나에게는 아기를 제외한 어떠한 것도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이 시어머니든, 닭백숙이든 관심 밖의 일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와 방에서 유축을 하고 있는데 닭백숙을 다 끓이신 어머님께서는 문밖에서 말씀하셨다.

 “빨리 나와서 뜨거울 때 먹어라.”

 “유축 마저 하고 나갈게요. 먼저 드세요.”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기어코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와 윗옷을 거의 다 벗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서 그만 짜고 나오라고 하셨다. 나의 모유와 나의 눈물은 순식간에 수치심의 산물로 변했다.


눈물을 삼키며 먹은 어머님의 닭백숙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휴 마지막 날, 아이의 오전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기차역까지 남편과 함께 모셔다 드렸다. KTX를 타시라고 표를 끊어드리려고 해도 어머님께서는 한사코 손을 저으시며 가장 싼 표를 구매하셨다. 손에는 다 비운 냄비가 들려있었다.

어머님께 미안한 마음과 서러운 마음이 동시에 드는 밉상스러운 마음들이 충돌하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찬 바람이 불어오던 11월, 아이는 결국 나의 곁을 떠났다. 수목장에 아이를 묻고 돌아서던 날, 그동안 겪었던 서러움과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울고 또 울기만 했다. 나만 빼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서로의 어깨를 보듬으며 새로이 시작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았고, 설날이 되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첫 설을 지내러 시댁에 갔다. 정말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어머님은 닭백숙을 준비하셨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어머님은 내 그릇에 닭다리를 담아주시고 많이 먹으라며 옆에서 내가 먹는 걸 지켜보셨다.

우리는 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하지만 불쑥불쑥 그렇지 않은 모습을 들키곤 한다.

어머님 또한 그런 척하며 애써 울음을 삼키고 계시다는 걸, 내가 여전히 울음을 삼키며 백숙을 먹으며 알게 되었다.


아이가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이는 우리의 곁을 떠났다.

나의 슬픔에만 침잠되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신경 쓸 수 없었던 내가 그 후로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결말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그렇지만 계절이 바뀌며 먹었던 두 번의 닭백숙을 생각하면, 첫 손주를 잃었던 어머니의 슬픔이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닭백숙은 비릿하고 짭조름한 눈물 맛이 난다.


모든 것을 잊고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떠난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들끼리 소리 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글은 제3회 오뚜기 푸드에세이에 공모했다가 똑떨어진 글입니다. 다시 읽어봐도 똑떨어질만했네요.

그래도 기억하기 위해 씁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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