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우리 모두에게는 추상표현주의자의 본능이 숨겨져 있다.

첫 번째 세션을 한 그날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양천생활문화센터 4층 다목적실에서 <어느 특별한 예사로움>의 첫 번째 세션을 진행했습니다. 총 20명의 참석자와 2명의 강사(저와 안 선생님)가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참여자들에게 공동 회화 작업을 제안했습니다. 성인 여자 한 명의 키와 비슷한 길이를 가진 100호 캔버스(162*100cm) 3개의 바탕색을 칠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기획자인 저와 안 선생님의 예상은 '바탕색 정도 칠하면 끝나겠지? 그럼 두 번째 세션에서 바탕색을 칠한 캔버스 위에 다양한 재료를 부착하여 부조를 만들어야겠다.'였는데 막상 바탕색 작업을 시작하고 나니 참가자들은 바탕을 칠하고 나서 그 위에 회화 작업을 더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만의 붓터치와 회화적인 모티브, 아이가 쓴 한자 '천지', 한자를 쓴 아이의 아버지께서 그리신 부등호, 어머님이 그리신 사랑 가득한 하트 등 다양한 요소들이 캔버스 위에 나타났습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회화 작업을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간 기회가 없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나보다.... 기회가 있었다면 다들 정말 즐기셨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탕색을 채색하고 그 위에 여러 모티브를 그리다 보니 제법 마띠에르가 두꺼운 회화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저는 예상외의 결과에 정말 놀랬습니다. 아주 평면적인 바탕색만 칠한 캔버스 3개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동 회화 작업, 2024년 8월 17일 양천생활문화센터



공동 회화 작업, 2024년 8월 17일 양천생활문화센터



공동 회화 작업이 끝난 후, 각자 에세이를 작성하고 드로잉을 창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모님들은 에세이에 아이의 탄생과 양육의 일련의 과정에 대한 회상과 감정을 담은 글을,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듣고 싶은 말 혹은 이루어지고 싶은 소원에 대한 글을 작성했습니다. 참가자마다 진지한 표정을 띠며 각자 다른 사건과 기억들을 도화지 위에 붓펜으로 적혀 나가는 모습을 보니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에세이를 술술 적어가시는 분도 있고 중간에 멈칫하면서 한참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다들 솔직하고 담백하게 글을 완성하셨습니다. 현장에서 쓰는 에세이다 보니 과장된 미사여구나 현학적인 표현은 등장하지 않았고 공감대를 깊이 형성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소들이 글에 많이 등장했습니다.


에세이와 연관된 드로잉을 창작하는 시간은 정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공동회화 작업과 에세이 작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어색함이 풀렸는지 참가자들은 옆자리에 앉은 다른 가족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저희가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목표로 삼았던 것 중 하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마주한 사람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저희가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세운 기대효과 중 하나였거든요. 예술적인 행위와 그 결과물 도출만이 아닌 새로운 관계와 유대감 형성도 저희가 기획한 <어느 특별한 예사로움>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드로잉 시간에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아버지들께서 정말 진심으로 한땀 한땀 그림을 그리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때는 '세상에 나와 도화지와 과슈 물감만 존재한다.'라는 느낌으로 초집중해서 회화 작업을 하셨습니다. 추상화를 그리시는 아버지도 계셨고 가족들과 함께 꽃구경을 하는 모습을 화면에 옮기시는 아버지도 계셨습니다. 네 명의 가족을 의인화한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4개를 도화지 가득 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을 향한 그분의 소망이 느껴져서 저 혼자 남몰래 뭉클했습니다. 순수한 아이들은 슥슥 삭삭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림을 그려갑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은 "저 한 장 더 그려도 돼요?"입니다. 방학에 학원 가느랴, 학원 숙제 하느라 바빴던 아이들이 도화지 위에서 자유로운 창작의 세계를 마음껏 누린 것 같아서 뿌듯했습니다.



추상표현주의 대표 작가 윌렘 드 쿠닝의 무제 5번



약 세 시간가량 진행된 첫 번째 세션을 종료하고 9월에는 공동 회화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번 더 모이기로 했습니다. 시민들이 참여한 예술 작품으로 10월에 오목한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는데 이 모든 작품들이 전시장에 설치된 모습이 너무 기대가 됩니다. 미술관은 보통 아티스트의 작업을 소개하는 공간이지만 시민들이 참여한 작업이 미술관에서 선보여지면 관람객에게 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것 같습니다. 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요. 한 곳에 주욱 모아둔 참여자들의 작품을 보면서 저는 '우리 모두에겐 추상표현주의자와 같은 표현의 본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940-50년대 미국을 주요 무대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강렬한 브러시 터치와 물감을 고의적으로 뿌리고 흘리는 듯 행동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 것이 특징입니다. 저희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의 공동회화를 보면서 제가 처음 느낌 감정은 '추상표현주의 같다.'였습니다. 100호라는 큰 사이즈의 캔버스에 20명이 거침없이 붓질을 해나가는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기도 했고 여기에 몰입한 참가자들의 표정은 몰입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보통 시민참여예술이라고 하면, 참여자인 시민이 있어야 성립이 되고 그리고 시민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어느 특별한 예사로움>을 진행하면서 이 조건들이 만나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진심으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지난 13년간 큐레이터 생활을 하면서 늘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리스트업 된 전시를 해왔는데 처음으로 시민참여예술을 진행하면서 우리의 소소한 이야기도 충분히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세션을 마치고 재료들을 정리하면서 작가가 되어본 참여자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9월에 한 차례 더 모여 추가 작업을 한 뒤 2024년 10월 2일부터 13일까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오목한 미술관(오목공원 내 위치, 오목교 옆 근방)에서 전시를 진행합니다. 시민참여예술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관심과 방문을 기다립니다. 표현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브런치 북과 저희가 기획한 전시가 공통점이 많은 것을 느낍니다. 표현의 장이 있는 그곳이 바로 전시장이고 관람객(독자)과 만나기 때문이죠. 우리 모두에게는 추상표현주의자의 본능이 있습니다. 표현의 본능을 잘 살려 아름다운 창작 활동을 삶에서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이전 08화 플로렌타인 호프만(러버덕 작가)의 가족에 대한 에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