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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기억

<어느 특별한 예사로움>의 hero

오디너리 콜렉터가 기획한 <어느 특별한 예사로움>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아빠와 아이입니다. 왜 아빠로 정했냐고 질문하시면, 대답은 '보통은 아빠들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엄마에 비하면 훨씬 부족하기 때문입니다'입니다. 물론 아빠라는 대상은 남성인 아버지를 지칭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늘도 가장의 역할을 하고 계신 싱글맘도 동일한 주인공으로 모십니다.


일상은 예사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이니까요. 주말이 특별한 것은 바로 그 앞에 월, 화, 수, 목, 금이라는 평일이 있고 그 뒤에 쉴 수 있는 주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주말에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저는 주말에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관람객들은 주말에 제일 많이 전시장에 찾아오시기 때문이죠. 예사로움이 특별해지려면 일상을 함께 지내는 사람 혹은 대상이 특별해져야 합니다. 저희 오디너리 콜렉터는 주말에 집에서 푹 쉬고 싶은 아빠(가장 역할을 하는 부모님)와 아이가 함께 작품 창작 활동을 하고 이를 미술관에 전시한다면 특별한 추억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본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아빠와 아이가 에세이와 드로잉을 창작하려면 필연적으로 대화를 하고 마음을 나눠야 합니다.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초등학생만 해도 부모님과의 대화는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벌써부터 거리감이 생긴 부모님과 창작의 경험을 공유한다먄 앞으로 살아가면서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될 수밖에 없겠죠.


이번 글에서는 저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아버지가 약 40년간의 회사생활을 하시며 자주 야근을 하시면서 집에 늦게 돌아오셨다면 제가 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저희 아버지는 늘 일찍 퇴근해서 집에서 저녁을 함께 드셨습니다. 회식 등 특별한 경우가 있지 않는 한 저녁 8시면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인천으로 출퇴근을 하셨던 어머니는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않으시고 부랴부랴 밥상을 차리셨고 그러는 통에 본의 아니게 늘 우아한 진주목걸이를 하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회사 일에 지쳐 늘 골똘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시며 식사를 하셨는데 몸은 집에 있었지만 마음과 머릿속은 여의도에 위치한 회사에 두고 오신 듯했습니다.


'남들도 다 우리처럼 저녁시간을 이렇게 보내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학창 시절을 보내고 취업을 했습니다. 대기업에 취업하여 새로운 사람들과 수많은 아버지들과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너무 신기했던 것은 그 수많은 아버지들이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퇴근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회사에 남아서 야근을 하면서 회사 직원들과 저녁까지 드시고 10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직장 상사(아버지) 들을 보면서 저는 그제야 저의 친정아버지가 집에 일찍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왜 일찍 집에 왔어? 우리 회사 과장님, 차장님, 팀장님은 퇴근이 맨날 늦어. 혹시 집에 가기 싫은가? 일이 그렇게 많은가? 집밥이 싫은가?" 유치원생이 할법한 유치한 질문들은 아버지에게 쏟아 놓았습니다.


친정아버지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내가 늦게 퇴근하면, 밑에 직원들이 다 집에 못 가잖아. 내가 나와야 다들 집에 가지. 나는 집에 와도 늘 일 생각을 했어."

"너네 팀장님, 과장님들도 성과를 잘 받고 싶을 거야. 열심히 일하시는 거니까 네가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이상하게도 쳐다보지 말아라. 외벌이는 더 힘들게 일할 수밖에 없다."


그때만 해도 저는 싱글이고 가족 부양의 의무가 없었기에 수많은 아빠들의 어깨 위에 있는 삶의 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보니 어렴풋이 가족 부양의 무게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저는 굉장히 늦게 두 발 자전거를 배웠습니다. 사실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두 발 자전거를 처음 타보았습니다. 요즘은 7살짜리 아이들도 두 발자전거를 잘 타는 걸 보면 전 굉장히 늦게 탄 것이죠. 철컥철컥 보조바퀴를 달고 네 발 자전거를 타는 저를 본 친정아버지는 문제 제기를 하셨습니다. “두 발 자전거 타기가 너무 늦다!” 그래서 1995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밤, 저와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두 발 자전거 타기 연습을 시작합니다. 운동신경이 없었던 저는 페달 한번 밟고 멈추고 세 번 밟고 넘어지고 좀처럼 앞을 향해 가지를 못했습니다. 몇 날 며칠 밤을 땀을 흘려가며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 타기를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다섯 번 페달질을 했고 넘어지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신기해서 뒤를 돌아보니 친정아버지께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좋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함께한 가장 강렬한 추억이자 30년 전 양천구로 이사 온 뒤 처음 경험한 성취였습니다. 그 뒤로 아버지와 함께한 많은 여행과 맛집탐방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자전거 타기의 기억이 가장 강렬한 이유는 이 장소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생활 반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장소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경험했고 30년 동안 같은 장소를 오고 가며 그 공간이 조금씩 변화를 겪어나갈 때마다 두 발 자전거 타기를 했던 것을 떠오릅니다.


예사로운 장소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위와 같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첫째 아이를 미술 학원을 데려다주며 제가 자전거를 배웠던 바로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유년시절의 좋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경험을 다른 가족들과 함께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의 프로젝트가 참가하시는 아빠(가장 역할을 하시는 부모님)와 아이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의미 있는 경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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