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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말해연 Apr 09. 2023

‘삶이 힘드니 108배를 해봅시다.’

퇴사하고 아르바이트하는 29살 | 셋째 주 이야기

#4월3일 월요일: ‘마법의 주문’

주말 이틀 내내 술을 마셨다. 무언가 일탈하는 기분이 좋았지만 다음날 숙취는 견디기 힘들다. 이틀 연장 마셨더니 간이 해독을 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쓴 듯 아침에 일어나니 피곤했다. 그래서 운동하려는 마음을 접고 108배를 했다.


108배를 하게 된 이유는 요즘 부쩍 짜증과 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마 아르바이트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짐작해 본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관성적으로 일을 하더라도 어느새 스트레스가 쌓여있다.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고, 그 요구가 감정적일 때 아무리 그 감정을 받고 싶지 않아도 나쁜 감정은 쉽게 옮는다. 그래서 감정노동, 감정노동 하나 보다.


108배를 하며 나를 덜 힘들게 만들어 줄 주문을 되뇌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절을 할 때 내려가는 동작에 횟수를 세고, 완전히 엎드렸을 때 주문을 왼다. ‘하나,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둘,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셋,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넷…’, … 108배를 하는 데에 30분 정도 걸렸고, 땀이 이마에, 등줄기에 송골송골 맺혔다. 몸은 개운해졌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108배 덕분인지 오늘 하루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았다. 오늘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살짝 감기 기운이 있고, 생리도 한창 하고 있어서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 그런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내가 덜 좋아하는 일을 맡게 돼도, 속으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되뇌고 그냥 주어진 일을 했다. 손님이 음료를 받고 예상한 반응과 달라도, 어떤 요구를 해와도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했고, 에너지도 덜 쓸 수 있었다.

오늘의 도시락: 팽이 구이, 주먹밥, 양념 치킨, 김치, 치킨무



#4월4일 화요일: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살감기 기운이 있었다. 성인이 되고 작년까지는 감기에 걸린 적이 거의 없는데, 면역력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그럼에도 마음수련 3일 차라서, 오늘 하지 않으면 작심삼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108배하고 다시 자더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했다.


오늘은 절을 하며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를 외웠는데, 그 말을 반복하다 보니 ’지금 아픈 것도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108배를 하면서 다리가 아파올 때도 ’살아있기 때문에 다리가 아픈 것이 느껴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절을 다 하고 나니 몸이 꽤 개운해졌다. 그 후 밥을 먹고, 몇 알 남지 않은 종합감기약과 진통제를 먹고 씻었다.

아침

오전에는 책상에 앉아 일을 했다. 외국어 교실에 가는 날이라서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입맛도 없고 너무 힘들어서 침대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그래서 결국 점심은 1시 넘어서 먹었고, 외국어 교실엔 가지 못 했다.

점심

일은 하지 못하겠고, 누워서 책을 읽으려니까 기운이 없고, 멍 때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4시 50분쯤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아르바이트에 갈 준비를 했다.

저녁 도시락

오늘은 또 다른 매니저님과 처음으로 함께 일하는 날이었다. 사람마다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누군가와 처음 일하게 되면 신경이 조금 곤두선다. 다행히도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많은 일을 나서서 해주고, 내 생각엔 호흡도 잘 맞아서 오늘은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이제 아르바이트에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 주문이 자주 들어오는 메뉴는 생각을 안 해도 손이 알아서 만들고, 긴가민가하는 메뉴는 그냥 대놓고 레시피를 보며 만든다. 마감을 하며 설거지를 하는 일도 이전에 비해 덜 힘들어졌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하루를 돌아볼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가 정말로 원했던 ‘사람이 좋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 충족되니 일하는 동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없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파도 살아있고, 살아있어서 행복도 느낄 수 있어 감사한 하루였다.



#4월5일 수요일: ‘처음 사용해 보는 108배 어플‘

어제 남자친구가 사다준 약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니 열은 떨어지고, 코와 목만 아팠다. 나의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아플수록 108배를 열심히 해야 한다. 몸이 아프면 짜증이 더  잘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7시에 일어나 108부터 했다. 오늘의 기도는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를 반복하며 절을 하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떠오른다. 오늘은 아침에 화장실을 아예 못 갔다든지, 날씨가 꾸리꾸리해서 기분이 처진다든지, 감기에 걸려 몸이 아프다든지, 반려묘가 자꾸 운다든지, 남자친구와 어떤 점이 맞지 않다든지 하는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계속해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들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임을 깨닫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신기하게 108배가 끝날 때쯤 그런 생각들을 놓을 수 있게 되고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아마 이 평화의 지속은 하루나 될까? 그러니까 매일 꾸준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아침을 먹고 오전에는 집에서 일을 했다. 점심도 집에서 먹고, 남자친구와 함께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 갔다. 나는 한 번 간 적이 있고, 남자친구는 처음이었는데 사장님이 감사하게도 나를 알아보셨다.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고, 메뉴가 나와서 받아다가 마시고 먹으며 각자 할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갑자기 3시 30분부터 브레이크 타임인데 미리 공지를 못 해 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오늘만 무슨 일이 있어서 브레이크 타임을 가진다고 하는데 당황스러웠다. 차례차례 오는 사람들을 보니 오픈 파티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있지만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사장님이 연신 미리 공지 못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하며 베이커리류를 잔뜩 싸주시고, 남은 커피도 새 커피로 만들어서 주셨다. 죄송하다고 다음에 방문해 주시면 서비스드리겠다며 배웅도 해주셨다. 사실 이것저것 챙겨주셔서 마음이 나아진 것도 있지만, 미안해하는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졌고, 사람이 정신이 없으면 깜빡하기도 하니까. 나도 그럴 때가 있고. 속상했지만 맛난 것들을 받아 들고 남자친구와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어떠한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집에 와서 수다를 좀 떨다가 도시락을 싸서 아르바이트를 갔다. 어제부터 말썽을 부리던 제빙기의 A/S가 오늘 온다고 해서 매니저님들이 퇴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제빙기를 정상 작동시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서 모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베이커리류 20개 주문이 들어왔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서 빵공장을 돌렸는데, 주문에 문제가 있어서 한 매니저님이 한참 씨름을 하다가 결국 해결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 갑자기 물류가 들어왔다. 평소에는 8시쯤 오는데 7시에 왔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저녁 도시락



#4월6일 목요일: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습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지만 컨디션이 점점 나아지고 있는 듯하다. 6시 50분에 기상하여 7시부터 108배를 했다. 오늘의 기도는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습니다.’ 요근래 남자친구와 잦은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내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은 이유가 크다. 그 문제가 지금의 나를 가장 괴롭게 하기 때문에 선택한 기도문이다. 108배를 하는 동안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 미워했거나 괴로웠던 대상들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 남자친구, 친구, 고객, 아는 사람 등등. 그러다가 한 사람 한 사람 어떤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든지 떠올린 뒤에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습니다.‘를 외웠다. 그러자 미웠던 감정이, 괴로웠던 감정이 한층 누그러듦을 느꼈다. 기도와 108배의 효과인지 몰라도 오늘 남자친구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행동을 하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108배를 하고 아침을 먹고, 씻고, 오전에는 일을 했다. 일을 다 하고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은행 업무와 장을 볼 겸 외출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쉬다가 남자친구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좌) 아침 / (우) 점심
남자친구가 만들어준 오므라이스


춥고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는 저녁이었다. 마감을 하는 것도 꽤 익숙해져서 별로 힘이 들지 않았고, 손님이 별로 없으니 오히려 심심했다. 덕분에 함께 일하는 매니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는 시간이 어렸을 땐 불편해서 빠르게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해가 갈수록 불편한 건 불편한 대로 시간을 보내야 텅비지 않은 친밀함이 쌓인다는 것을 배웠다.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많은 생각 없이 아르바이트 일을 해내는 것처럼, 손님이 많은 날엔 함께 정신없이 일하고, 손님이 없는 날엔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나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곳에선 사람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오늘의 기도문을 실천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손님은 별로 없었지만, 그 몇 명 되지 않는 손님들이 대체로 특이하게? 자신의 취향껏 메뉴를 주문했다. 요즘말로 커스텀 메뉴라고 하는데, 기본 메뉴의 구성을 변경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토핑을 추가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일하며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메뉴들이었고, 커스텀으로 인해 조리 과정이 달라져서 당황스러움에 순간 마음에 짜증이 일었는데, 속으로 오늘의 기도문 ’(상대방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합니다 ‘를 외우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이 순간 상대에 대한 짜증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그런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기도문이 도왔다. ’이렇게 주문하면 이렇게 만들면 되는구나‘하고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한 날이었다.

사실 이번주에 몸살로 아팠다고 하니 매니저님이 챙겨주신 감기약들.


#4월7일 금요일: ‘이번주의 마지막 근무날’

어제 매니저님이 준 약을 먹었는데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보다는 나아졌지만 오늘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일어났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108배도 해야 하고, 밥도 먹고, 씻고, 오전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108배를 하며 또다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를 외웠다. 절을 하는 초반에는 여전히 마음이 조급했다. 자꾸만 빨리 절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천천히 절을 했다. 그리고 기도문을 꼭꼭 씹어 삼켰다. ‘몸이 좋지 않을 수 있지‘, ’몸이 좋지 않으면 늦게 일어날 수도 있지‘, ’밥을 늦게 먹을 수도 있지‘, ’오늘 할 일들이 조금씩 미뤄질 수도 있지‘하며 조급함을 내려놓고자 했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 조차 하지 않고, 절 횟수와 기도문에 오롯이 집중하는 나를 발견했다. 마침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절을 다 하고, 아침밥을 먹고, 평소와 똑같이 생활했다. 내가 직장인이었다면 일과가 밀리면 업무에 지장이 있겠지만, 나는 나의 일을 하니까 유연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좋은 건 좋은 대로, 나쁜 건 나쁜 대로 수용하는 것. 그것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이날은 남자친구가 가져다준 김밥과 두부&돼지고기김치볶음을 도시락으로 챙기고, 매니저님들과 나눠먹으려고 마트에서 산 신상과자 딸기바나나킥을 가져갔다. 출근했더니 대표님이 제주도에 갔다 오면서 사온 땅콩초코찰떡파이를 매니저님이 전달해 줬다. 두 개를 챙겨줬는데 거기에 매직으로 내 이름의 초성인 ㅎㅇ과 나의 남자친구를 가리키는 ㅎㅇㄴㅈㅊㄱ가 적혀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소하게 서로를 챙기는 분위기에서 일한 적이 없었어서 참 감동이었다.

저녁 도시락
(좌) 내가 가져간 딸기바나나킥 / (우) 대표님이 사다준 땅콩초코찰떡파이

이제는 대부분의 레시피를 알고 있어서 음료를 만드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고, 마감 업무도 익숙해져서 수월한 한 주의 마지막 날이었다. 일이 익숙해지니 함께 일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어서 좋았는데 다음 주에는 또 다른 매니저님이 나와 일한다고 한다. 적응의 연속이지만 다음 주에 만날 매니저님은 어떤 분 일지, 함께 일하는 건 또 어떨지 기대된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기록하니 감사할 것들이 하나둘씩 보여서 참 좋다.
나쁜 날 같은 날도 잘 들여다보면 하나쯤은 좋은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거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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