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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정 Nov 13. 2021

내 집에서 혼자서 완전하게

완전하지 않아도 좋지만

 부산에 왔다. 본가에 왔다고 말해야 하려나. 오후 비행기임에 불구하고 갑자기 결정된 일정이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백수가 되곤 3개월에 한 번씩은 착실히 본가에 내려왔다. 엄마 생신, 아빠 생신, 설날, 추석, 내 생일까지도 부산에서 보냈다. 혼자 있는 서울에선 어떻게 생일을 보냈는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먼저 연락하지 않는 나에게 늘 누군가가 먼저 생일을 같이 보내자고 연락했음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참 운이 좋았다. 한창 일주일에 2,3번을 보는 친구와 멀어졌을 때도 그 빈자리를 매번 누군가가 채워줬으니까. 주는 거 없이 받는 게 참 많은 사람인 걸 깨닫는다.


 오늘은 아빠 생신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기로 했다. 시간만 나면 착실히 넣었던 이력서에 대한 대답이 타이밍 좋게 쏟아진다. '비슷한 직무를 경험하셨더라도 실행하셨던 프로젝트들의 산업 분야, 기간, 규모, 본인의 역할, 기술 적합도에 따라 기업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늘 이력서에 대한 대답은 두르뭉실하다. 회사에선 핵심만 간단히 말하는 걸 가르치면서도 회사는 나에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너의 경력은 물 경력이라고. 어디에서도 꾸준히 있지 못하는 경력은 쓸모가 없다고.'라는 말을 아주 삥삥 돌려 말하는 회사들. 하긴 회사가 개인을 상대로 그렇게 한다면 대서특필 감이지. 애매모호함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는 상황이 있음을 나도 안다. 그래도 힘이 나지 않는 건 다른 문제다. 저런 메시지를 몇 통 이상 질서 있게 와다다 받는 오늘 같은 날은 도저히 새로 시작할 힘이 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죽이는 중이다. 차라리 내일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고 내일 출발하는 부산 비행기 편을 오늘로 당겨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그러곤 분주히 움직인다. 밀린 빨래를 돌리고, 쌓인 일반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한다. 일주일은 집을 비우기 때문에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물들도 남김없이 정리해야 한다. 양파와 마늘은 용도에 따라 송송 썰어 냉동실에 얼리고, 남은 야채는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지만 키친타월을 쌓아서 차곡차곡 밀폐용기에 넣어둔다. 양배추는 도저히 감당이 안될 거 같아서 대충 썰어서 냉동실 직행. 냉장고를 보니 이미 내려갈 채비를 한 사람인양 빈자리가 많다. 도서관에서 몇 주전 빌려둔 일곱 권의 책의 대출기간이 아슬아슬하다. 몽땅 끌어안고는 도서관으로 간다. 하필이면 비는 내리고 책은 무겁다. 그래도 도서관을 1분 만에 갈 수 있는 건 행운이다. 몇 주전 도서관에 구매 신청해둔 책 3권이 도착했다는 메시지 떠올린다. '그 책도 빌려서 부산에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이나 읽어야지'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월요일은 휴관일입니다. 


 그대로 자동반납기로 발걸음을 옮긴다. 책은 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오늘은 반납이 목표였으니 이걸로도 충분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분리수거와 버릴 쓰레기들을 처리하고, 방바닥을 청소기로 훑고, 먼지떨이로 책상이나 트롤리 위를 훔친다. 이렇게 집을 나갈 채비를 하니 비소로 이곳이 '내 집'이라는 걸 실감한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매 달 월세를 내고 이자를 내도 그 집이 내 집 같지 않은 마음이 계속됐다. 어느 날은 계속 부산 광안리가 떠올랐고, 부산 서면의 시끄러움이 그리웠고, 부산 집에서 시민공원까지 걷는 그 거리를 계속 걸었다. 마음은 부산에 있고, 몸만 서울에 있는 그런 이상한 형태의 서울살이가 꽤 오래갔다. 


지금은 서울과 부산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다. 부산에 가서 자주 서울 내 집을 생각한다. 혼자서 멍하니 걷는 한강 산책길을 걷고, 추리닝을 입고 동네 카페를 가고, 도서관을 가서 책을 잔뜩 빌리는 상상을 부산에서 자주 한다. 며칠 전 이유도 없이 부산 집에서 뒤집힌 피부도 결국 진짜 내 집은 서울 집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하다. 부산 집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부모님의 곁이 좋긴 하지만, 조금 편하게 서울 집에서 혼자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쓴다.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소파에 누워보고 엄마 아빠의 퇴근시간을 기다렸다가 과한 식사와 음주를 하고, 주말에는 시민공원까지 걸어가서 2만 보쯤 걷고. 참 잘도 쉬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일상을 찾아야 한다. 다시 결국 내 자리로 돌아간다. 혼자서 완전하게. 아니지 완전하지 않아도 좋지.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다. 우리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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