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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Oct 17. 2020

보이지 않게 되자, 본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 by 주제 사라마구

모두가 눈먼 세상, 눈 뜬자는 왕이 아니라 목격자


한글 번역판 표지. 시각적 표현이 멋지다. 출처) 교보문고


어느날 멀쩡하던 한 남자가 갑자기 장님이 된다. 온세상이 하얗게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잘 보이던 눈이 갑자기 먼다는 게 굉장히 이례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그다지 큰 일은 아니다. 그런데 큰 일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 '장님'이 되는 것이 전염병이었기 때문이다.


전염이 돼서 눈이 멀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만, 그 말도 안되는 소리가 사실이다. (살다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남자와 한 공간에서 눈을 마주쳤던 사람들은 모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장님이 돼버렸다. 그들과 눈을 마주쳤던 사람들도, 또 그들과 눈을 마주쳤던 사람들도. 그렇게, 온 세상이 전부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눈이 멀면 좀 불편하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나만 눈이 먼 게 아니라 모두가 눈이 멀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이끄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면.


이건 무정부 상태, 커다란 재앙, 디스토피아. 수도도 끊기고, 전기도 끊기고. 아무도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렇게 멈춘 세상에서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만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 눈이 멀쩡한 여자가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오직 그녀만이 두눈이 멀쩡하다. 장님의 세계에선 눈을 가진 자가 왕이라 했던가? 아니, 그녀는 목격자였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걸, 사람들이 끝내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동물의 영역으로 내려가는 걸 목격하는 유일한 사람.


눈먼 자들이 우왕좌왕하고 별일 아닌 걸로 다투고, 모두 상생할 길이 있는데도 탐욕 때문에 파멸로 들어가는 모습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우습겠난가. 그리고 얼마나 슬프겠는가. 아마 신이 인간들을 보는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책을 읽는 게 쉽지는 않다. 내용 자체도 무척이나 어둡고 슬픈데, 작법 자체가 어렵게 되어 있다. 여러 문장들이 나뉘어 있지 않고 쉼표를 이용해서 계속 연결된다. 어떤 문장들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정도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때도 따옴표도 없이, 누가 말한다는 설명도 없이 대화가 오직 쉼표로만 계속 나열된다. 읽으면서 이게 누가 한 말인지 추측해야 한다. 쉼표 뒤에 나오는 문장이 같은 사람이 계속 말하는 건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건지 헷갈릴 때도 많다. 답답하다.


마치 나도 눈먼 자가 되어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듯한 작법이다.


작가가 대단한 것 같다. 여러 의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책이 너무 어둡고 힘들어서, 영화는 차마 볼 용기가 안 난다. 출처) 다음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든 생각.


모두와 함께 눈이 멀어버리는 게 나을까, 나 혼자서라도 보이는 게 나을까?

사람들은 못보는 걸 혼자 목격하게 되는 그녀. 하느님이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 이럴까?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추악함에 하느님도 눈물 흘릴까?

읽기가 쉽지 않다. 치료하려면, 아무리 피가 낭자하고 상처가 끔찍해도 두눈 크게 뜨고 들여다봐야 하는데.. 자꾸 눈감고 회피하고 싶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추악한 것인가? 극한에 몰리면 추악함이 드러나는 것인가?

책과 달리 우리들은 눈이 보이자만,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다른가. 인간은 눈이 보이건 안 보이건, 여전히 추악하다. 눈이 보인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책 속 사람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선뜻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읽고 나서도, 읽는 동안에도 힘든 책이다.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1.

I don't think we did go blind, I think we are blind, Blind but seeing, Blind people who can see, but do not see. 

난 우리가 장님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생각에 우리는 장님이에요, 장님인데 보는 거죠, 볼 수 있는 장님들, 하지만 보지는 않아요.


 볼 수는 있지만, 보려하지 않는 사람들.



2.

You never know beforehand what people are capable of, you have to wait, give it time, it's time that rules, time is our gambling partner on the other side of the table and it holds all the cards of the deck in its hand, we have to guess the winning cards of life, our lives. 

사람들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우리는 결코 미리 알 수가 없어요, 기다려야 해요, 시간을 두고요, 모든 걸 지배하는 건 시간이에요, 우리는 시간과 마주 앉아서 도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 모든 카드를 다 쥐고 있지요, 우리는 우리 인생과 삶에 어떤 카드를 가져야 이길 수 있을지 추측하는 수밖에 없어요.


3.

If we cannot live entirely like human beings, at least let us do everything in our power not to live entirely like animals. 

만일 우리가 온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게끔, 온 힘을 다해야지요.


4.

Just as the habit does not make the monk, the scepter does not make the king. 

승려복이 수도승을 만드는 게 아니듯, 왕의 홀이 왕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5.

The only thing more terrifying than blindness is being the only one who can see. 

장님이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볼 수 있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는 것이다.




저자: 주제 사라마구 (Jose Saramago)
제목: 눈먼자들의 도시

원서 제목: Blindness

옮긴이: 정영목

출판사: 해냄

특이사항: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음. 줄리언 무어, 마크 러팔로 주연.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해냄 출판사 것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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