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풍자극 by 폴 오스터
책을 좋아하고 책을 좀 읽었다고 말하는 내게도 책에 대한 편견이 있다. 고전은 어려울 거 같고, 문학적으로 찬사를 받는 작가의 책은 무거울 거 같다는 편견. 그렇지 않은 사례들을 종종 접했음에도 이 편견이 지속되는 건 좀 어릴 때 정착한 사고라서 그런 것 같다.
폴 오스터는 글이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진 작가 중 하나였다. 굉장히 유명하다는 건 아는데, 왠지 책은 어렵고 현학적일 거 같아서 그의 책은 읽은 것이 없었다. 이 책은 전에 중고 서적으로 구매를 해놨던 것인데, 1년 가까이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읽게 됐다. 다 읽고 난 소감은...
역시, 편견은 가지면 안 된다.
출처: 교보문고
책 내용과 매우 잘 어울리는 표지. 간만에 마음에 드는 표지를 만났다. ^^
책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는 59살의 네이선이다. 보험 설계사로 일하다가 회사에서는 은퇴를 했다. 은행에 약간의 잔고가 있었기에 당분간 생활하는데 큰 불편은 없었지만, 어쨌건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직장도 없지, 이혼한 전 부인은 자기를 악마 보듯 하지, 하나뿐인 살갑던 딸과의 사이도 껄끄러워졌지. 이 나이에, 이제 뭘 더 바라겠는가.
하지만 그가 삶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 택한 도시 브루클린은 신선하게 살아서 펄떡이는 도시였다. 브루클린은 삶을 마무리할 도시가 아니라, 삶을 재충전하고 새롭게 시작할 최적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연락이 끊겼던 조카를 만나고, 서먹해진 딸과 다시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막연히 생각해왔던 수필 쓰기에 도전한다. 그는 조카를 매개로 다른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도움을 주면서, 점점 삶에 활력을 찾아가게 된다.
출처: Goodreads
영어책 표지. 원서 표지도 무척 마음에 든다. 책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전에 김영하의 단편소설집 <두 사람>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 이 사람. 이야기꾼이다." 얘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풀어내는지 큰 사건사고가 없더라도 뒷얘기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마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얘기가 궁금해서 세헤라자데를 죽이지 못했던 술탄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나 할까.
<브루클린 풍자극>이 바로 그렇다. 주인공 네이선이 새로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아온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재미있고 뒷얘기가 궁금해진다. 폴 오스터 책들 중 가장 따뜻한 책이라고 하더니 (물론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맞는 말 같다. 따뜻하고 정감이 가는, 내 오랜 동네 사람들 이야기 같은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제목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은 아마도 원제인 The Brooklyn Follies를 그대로 번역한 것일 텐데, 원서의 제목을 있는 그대로 가져왔으니 잘못된 제목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왠지 '풍자'라고 하면 '뭔가 잘못되거나 나쁜 것을 우스꽝스럽게 비판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브루클린의 안 좋은 면들을 비꼬면서 우습게 비판하는 책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책은 브루클린에 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따스하고 재미있게, 슬플 수 있는 일도 다소 유머스럽게 잘 녹여낸 책이다. 마치 재미있는 일일 드라마처럼. 그런 점이 제목에서도 드러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약간 안타깝기는 하다. 차라리 <브루클린 사람들> 이런 평범한 제목이 내용과는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1.
As long as a man had the courage to reject what society told him to do, he could live life on his own terms. To what end? To be free. But free to what end? To read books, to write books, to think. To be free to write a book like Walden. (p. 16)
사람은 사회가 강요하는 걸 거부할 용기만 있다면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어요. 뭘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죠. 그렇지만 어떤 자유를 위해서?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생각할 자유. <월든> 같은 책을 쓸 자유.
2.
I am not a heavy drinker, but there are moments in a man’s life when alcohol is more nourishing than food. (p. 63)
난 술을 많이 마시진 않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술이 음식보다 우리에게 더 영양가가 있는 순간들이 있다.
3.
That was because writing was a disease, Tom continued, what you might call an infection or influenza of the spirit, and therefore it could strike anyone at any time. The young and the old, the strong and the weak, the drunk and the sober, the sane and the insane. (p. 149)
왜냐하면 그건 글을 쓰는 게 병이라서 그래요, 하고 톰은 계속 말했다. 영혼이 감염됐다거나 영혼이 독감에 걸렸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글쓰기 병'은 누구나 언제든지 걸릴 수 있어요.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강한 사람, 약한 사람, 술 취한 사람, 술이 깬 사람, 멀쩡한 사람, 미친 사람.
나도 그 병에 걸렸다. 글쓰기 병.
이왕 걸린 거, 제대로 된 것 좀 써보자!!!
4.
I saw it coming a long time ago, but I was too weak to stand up for myself, too nervous to fight back. That’s what happens when you think the other person is better than you are. (pp. 260-261)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난 나 자신을 지키기엔 너무 약했고, 맞서 싸우기엔 너무 불안했어요. 내가 남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사달이 나는 거죠.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황보석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