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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Sep 11. 2021

'난민'이 이름과 얼굴을 가지게 될 때

아메리칸 더트 by 제닌 커민스

난민이 되어 버렸다.


멕시코 남서부의 한 작은 도시 아카풀코.

생일 파티 때문에 친척들이 모두 모인 할머니 댁, 갑작스럽게 닥친 괴한들이 총을 난사한다. 화장실 욕조 속에 숨은 엄마 리디아와 9살 소년 루카만 빼고, 열여섯 명의 일가족이 모두 몰살당하고 만다. 이 총격이 일어난 건 기자였던 리디아의 남편 때문이었다. 리디아의 남편은 아카풀코의 마약 카르텔의 수장을 폭로하는 기사를 썼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카르텔이 그 일가족을 모두 죽여버린 거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리디아와 루카. 하지만 아직 안도하긴 이르다.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걸 알면 그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와 죽일 테니까. 리디아는 어린 루카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한다.


멕시코는 위험하다. 곳곳에 범죄자들과 카르텔의 끄나풀들이 설친다. 이들은 다른 도시의 카르텔과도 협력을 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있더라도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미국으로 가야 한다. 

리디아는 배낭만 하나 달랑 맨 채, 9살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국경을 넘어 미국 땅, 엘 노르테로.



미국으로 가는 길

멕시코에서 카르텔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승객을 일일이 확인하는 비행기는 엄두도 낼 수 없다. 국경 근처까지 가는 버스나 기차는 없다. 유일한 통행 수단은 손님을 싣지 않는 화물 열차. 그 열차의 지붕에 올라타야 한다.


당연히, 역에서는 화물 열차에 올라탈 수가 없다. 출발해서 서서히 속력을 내는 기차 옆에서 함께 달리다가 기차에 매달려야 한다.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매달려가다 밑에 깔려 죽는 사람, 열차 지붕에서 떨어지는 사람, 낮은 터널이나 굴다리, 길게 자란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멕시코 북쪽 국경까지 가는 길에 이들이 조심해야 하는 건 카르텔뿐만이 아니다. 경찰(이면서 카르텔), 밀입국 단속반(이면서 카르텔), 강도들(이면서 카르텔)….


이동하는 난민들 중 많은 이들이 온두라스, 과테말라 등 중앙/남 아메리카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저항할 수 없는 위치라는 걸 악용해서 많은 이들이 열차를 노린다. 그들은 화물열차를 습격해서 (때로는 차장에게 뇌물을 주어 일부러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 열차를 잠시 세우게 해서) 열차 지붕에 탄 사람들을 사냥한다. 이들은 그들의 짐과 돈을 뺏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밀입국자들을 그들의 나라로 추방하고, 때로는 납치해서 팔아먹고, 인질로 잡아 돈을 뜯어내고, 경찰에게 넘겨 현상금을 받아낸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미국과 맞닿은 멕시코 북쪽 국경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돈을 받고 이들을 국경 너머로 밀입국시키는 걸 도와주는 사람, 일명 ‘코요테’를 잘 만나야 한다. 코요테에게 내야 하는 돈도 만만치 않게 많은데, 혹시라도 질 나쁜 코요테를 만나게 되면 돈은 돈대로 잃고 오히려 코요테의 손에 이끌려 밀입국 단속반에 끌려갈 수도 있다. 아니면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에서 이들을 팽개치고 도망칠 수도 있다.

이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역경을 딛고 미국에 도착하게 되면, 미국 땅의 흙(American dirt)을 밟게 되면, 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출처: 교보문고

원서 표지와 번역본 표지가 같아서 하나만 들고 왔다. 저 가시 돋친 철조망만 지나면 파랑새가 날고 있는 행복한 세상이 펼쳐질까?

표지는 마음에 드는데, 표지 위에 적힌 문구가 조금 거슬린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엄마?"

"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 우린 모험을 할 거야."


세상 물정 모르는 9살 소년에게, 우린 지금 목숨을 건 탈출을 하는 거라고 솔직히 말하긴 어려웠을 거다. 그 아이에게 '모험'을 할 거라고 말하는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미어질까.

그런데 저 부분만 똑 떼어서 표지에 실어놓으니, 마치 어린 아들과 진짜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처럼 보일까 두렵다. <신밧드의 모험>이나 <땡땡의 모험>처럼, 온갖 위험을 겪지만 겉으로는 신나는 디즈니의 어드벤처 액션 영화 같은, 그런 내용이라고 오해할까 봐. 

굳이 비교하자면, 이건 '러시안룰렛 게임' 같은 거다.

한 번만 삐끗해도 죽는.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운에 의해 결정되는.

그것도 모험이라면, 모험이겠지.




난민이 이름을 가지게 될 때


뉴스에서 가끔씩 이들을 본다. ‘난민들’. 주로 미국으로 넘어오는 긴 행렬의 모습으로 뉴스에 나오지만, 때로는 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떠난 이들도 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예로는 지난달 아프가니스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있을 거다. (물론, 그들은 난민이 아니라 '특별 기여자' 자격으로 온 거지만, 그들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절박한 사정과 목숨을 건 탈출이라는 점은 비슷할 것이다.)


난민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아, 저 사람들 힘들겠구나, 정도. 저렇게 많이 몰려오면 다 받아주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 정도. 그렇다고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도 없고, 문제네, 정도.


말하자면 ‘내 일’이 아닌 그저 뉴스로 보는 ‘남의 일’이었던 거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난민’들이 이름을 가진다. 서점 주인이었던 리디아, 9살 소년 루카, 15살, 14살 자매인 솔레다드와 레베카. 단순히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불법 취업하는 게 아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난민들.


책을 다 읽고 나도, 난민 문제는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무조건 높은 장벽을 설치하는 게 해답은 아니라는 것, 적어도 모두가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다.


책을 읽고 내가 느낀 바를 구구절절 적는 대신(이미 많이 적긴 했지만), 작가의 말 중 일부로 대체할까 한다.


미국 남쪽 국경을 향해 오는 사람들이 그저 얼굴 없는 갈색 군중이 아니라 자신만의 사연과 배경, 미국으로 와야 했던 이유가 있는 개개인임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뉴스에 나오는 난민들을 볼 때 저들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랐다.





나를 깨우는 말들


1.

Most people were like Lydia; they didn’t want to know. They tried to insulate themselves from the ugliness of the narco violence because they couldn’t handle it.

대부분 사람들은 리디아와 같았다. 그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마약 폭력의 추악함으로부터 자신들을 격리하려고 한다.



2.

미국 국경을 넘는 건 아주 긴 여정이다. 국경에 도착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화물 열차를 타러 가는 데까지도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멕시코 사람이 아니라 중남미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여행하는 거리는 더 길어질 것이다.) 그렇게 전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나마 머물 자리와 먹거리를 마련해주던 신부님. 그 신부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먼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미국, 엘 노르테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If it’s only a better life you seek, seek it elsewhere,” the padre continues. “This path is only for people who have no choice, no other option, only violence and misery behind you. And your journey will grow even more treacherous from here. Everything is working against you, to thwart you. Some of you will fall from the trains. Many will be maimed or injured. Many will die. Many, many of you will be kidnapped, tortured, trafficked, or ransomed. Some will be lucky enough to survive all of that and make it as far as Estados Unidos only to experience the privilege of dying alone in the desert beneath the sun, abandoned by a corrupt coyote, or shot by a narco who doesn’t like the look of you. Every single one of you will be robbed. Every one. If you make it to el norte, you will arrive penniless, that’s a guarantee. Look around you. Go ahead—look at each other. Only one out of three will make it to your destination alive. Will it be you?” (p. 169).

“여러분이 찾는 게 단지 더 나은 삶이라면, 다른 곳에서 찾으세요.”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이 여정은 오직 아무런 선택권도 남지 않은 사람들, 오직 폭력과 비참함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만을 위한 길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여정은 훨씬 더 위험해질 겁니다. 모든 일이 여러분에게 불리할 것이고, 여러분을 방해할 겁니다. 여러분 중 몇몇은 기차에서 떨어질 겁니다. 많은 분들이 불구가 되거나 다치겠죠. 많은 분들이 죽을 겁니다. 아주, 아주 많은 분들이 납치당하고, 고문받고, 팔려가고, 인질로 잡힐 겁니다. 어떤 분들은 운이 좋아서 이 모든 걸 겪고도 살아남아 미국에 당도할 겁니다. 그리고 부패한 코요테(국경 넘는 걸 도와주는 길잡이)에게 버림받거나 당신을 싫어하는 마약상에게 총을 맞고 뜨거운 태양 아래 사막에서 홀로 죽어가게 되겠죠. 여러분 모두 돈을 빼앗길 겁니다. 여러분 모두가요. 만일 여러분이 엘 노르테(미국)에 도착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무일푼, 빈털터리로 도착하게 될 거예요. 그건 확실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자, 어서요. 서로를 바라보세요. 세 명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서 도착하게 될 겁니다. 그게 당신이 될까요?”


처음엔 그저 걱정이 많은 신부님의 잔소리 같은 충고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저 조언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된다.



3.

선택의 여지없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사람들.

열다섯, 열넷 두 자매도 그렇게 길을 떠나게 된다.


“Don’t you dare come back here,” the nurse says. “Don’t even think about it. Do you hear me?”

“How old are you girls?”
“Fifteen,” Soledad says.
“Fourteen,” says Rebeca.
“Good. Your papi wants you to live until you are one hundred years old, okay? You cannot do that if you come back here. Keep going.” (p. 202)

“절대 여기로 돌아오지 마.” 간호사가 말했다.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내 말 알겠니?”

“너희 몇 살이니?”
“열다섯이요.” 솔레다드가 말했다.
“열 넷이요.” 레베카가 말했다.
“그래. 너희 아빠는 너희가 백 살이 될 때까지 살기를 바라셔. 알겠니? 너희가 여기로 돌아오면 그럴 수 없어. 계속 가야 돼.”


조직에게 당한 아빠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다. 아빠 곁에서 간호하고 싶지만, 간호사는 두 자매에게 떠나라고 한다. 너희가 여기 남아있으면 너희도 조직에게 개죽음을 당할 거야.



4.

미국 국경을 향해 가던 중에 낯선 그룹에게 붙잡히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군복을 입었건, 경찰복을 입었건 그건 상관없다. 그 옷을 입었다고 그들이 진짜 군인이거나 경찰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들이 진짜 군인이거나 경찰이라 하더라도 부패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렇다면, 낯선 그룹에게 붙잡혔을 때 가장 좋은 최상의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They understand that the best-case scenario now is to be captured by a man who obeys the dictates of his uniform, a man who will detain them and process them, and then erase their entire journey, and send them back to wherever they started. That is the best-case scenario. On the other hand, they know, this capture might not be bureaucratic at all. Perhaps there’s no one waiting to process them, fingerprint them, and send them home. Instead, this capture may turn out to be much more nefarious than that: kidnapping, torture, extortion, a finger chopped off and photographed for the threatening text they will send to your family in el norte. A slow, excruciating death if your family doesn’t pay up. (p. 217).

지금 상황에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행정 명령을 잘 따르는 사람에게 붙잡히는 것이라는 걸 이들은 알고 있다. 이들을 구류하고, 업무를 처리해서 지금까지의 여정을 모두 무위로 돌리고 이들을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려보낼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최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체포는 행정적인 게 아닐 테니까. 아마도 이들의 신분을 처리하고, 지문을 찍고,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대신에 이 체포는 훨씬 극악무도한 현장일지도 모른다. 납치, 고문, 착취. 손가락을 자르고 사진을 찍어 돈을 요구하는 협박과 함께 미국에 살고 있는 (먼저 탈출한) 가족에게 보내질 편지. 만일 그 가족이 돈을 지불하지 못한다면? 아주 서서히, 그리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죽음뿐.


최상의 시나리오는 기껏해야 돈을 뺏기고, 자신이 탈출하려고 해던 원래 지역으로 되돌려 보내지는 것. 그것이 최상이다.



5.

난민들을 습격해서 그들을 등쳐먹는 놈들. 그들에게도 자기 합리화의 이유는 있다.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난민들은 나쁜 놈들이니까 괜찮잖아?


“They had to leave where they came from because they got in trouble there, you understand. Good people do not run away.” (pp. 235-236)

“알겠지만, 이 사람들은 고향에서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거길 떠나야만 했다고. 착한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아.”


정말 그런가? 착한 탈레반은 도망치지 않는데, 문제를 일으킨 난민들이 고향을 탈출하는 건가?



6.

언니인 솔레다드는 애써 동생을 위로하지만, 긴 여정을 겪으며 동생은 깨달았다.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고, 엘 노르테도 지상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Three hundred miles,” Soledad says. “And then it’s all over. All this nightmare, the whole thing, all of it. We will be in el norte, where no one can hurt us anymore. We’ll make a good, safe life.

Rebeca has been cured of innocence. She knows there’s no safe place for them in the world, that el norte will be the same as anywhere else. Hope cannot survive the poison of her recent proof: the world is a terrible place. San Pedro Sula was terrible, Mexico is terrible, el norte will be terrible. (p. 258).

“3백 마일만 가면.” 솔레다드가 말했다. “이제 다 끝나. 이 악몽도, 이 모든 게 전부 다. 엘 노르테에 도착하면,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하지 못할 거야. 우리는 안전하고 괜찮은 삶을 살아갈 거야.”

레베카는 이제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그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는 걸, 엘 노르테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일 거라는 걸 안다. 희망은 삶이라는 독을 이겨내지 못했다. 세상은 끔찍한 곳이다. 산 페드로 술라(두 자매가 떠나온 고향 온두라스)는 끔찍한 곳이었고, 멕시코는 끔찍한 곳이고, 엘 노르테는 끔찍한 곳일 거다.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아가는 건, 혹시라도 만에 하나 합법적 체류신분을 갖게 된다 할지라도 갈색 피부의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건, 부모형제 없이 어린 두 자매만 빈털터리로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건...

과연 이들의 앞에 안전하고 괜찮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제목: 아메리칸 더트

원서 제목: American Dirt

저자: 제닌 커민스 (Jeanine Cummins)

옮긴이: 노진선 옮김

출판사: 쌤앤파커스


*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한글 해석은 노진선 님의 번역이 아니라 제가 원서를 읽고 해석한 것입니다. 한글 출판본과는 번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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