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계를 넘어서
시나리오 학원 기초반을 수료하고 전문반에 입학했다. 영희는 장학금으로 전문반 학생이 됐지만 보조 작가로 출근해야 해서 입학을 유예했다. 전문반은 더 많은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했고 합평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보름에 한 번 정도 순서가 돌아오기에 시간에 쫓긴 나는 이전에 썼던 단편소설을 시나리오로 개작해서 냈다.
학원에 다니면서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시나리오 쓸 때는 글 속 장면으로 공간 이동을 한다. 시나리오 속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한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지만 SF 시나리오를 쓸 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산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공상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다. 자세한 묘사는 안 하지만 ‘눈에 보이게’ 써야 하는 영화 시나리오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다음으로 ‘대사’ 쓰는 실력이 늘었다. 대사로 심리와 감정을 전하게 됐고,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싶을 때는 조연의 입을 통해 ‘정보’를 주었다. 정보를 받은 주인공은 새롭게 계획을 짜고 움직여야 한다. 소설은 주로 나만 등장했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조연, 조력자, 악당 등 다양한 사람을 활용하게 되었다.
시나리오는 ‘재미’ 있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동의한다. 수억, 수십억 원을 들여 제작하는 영화는 흥행을 목표로 하고 그러려면 재미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써야 재미있을까?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그렇게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철수에게 “형 글에는 유머 코드가 있어. 내가 배우고 싶은 능력이야.” 하는 말을 들어 위안이 됐지만, 위안이 글을 써주지는 않는다.
당시 [달마야 놀자]라는 조폭 영화가 흥행했다. 그러자 비슷한 류의 조폭 영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달마야 놀자]를 재미있게 본 나도 조폭 시나리오를 썼다. 조폭 집단이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보험회사 설계사가 되는 과정이었다. 예컨대 보험 교육 과정에 ‘친절하게 말하라’를 배웠는데 습관대로 욕을 씨불이면 엉덩이를 맞는다. 고객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데 떠벌이면 하루 동안 침묵의 방에 가둔다. 그 안에서도 혼잣말을 하면 보스가 들어와 집게를 입술에 물린다.
시나리오를 읽은 선생님이 말했다. “영화판에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른다는 말이 있어.” 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얼굴을 바라보자 “남 따라 하지 말고 자네 글을 써.”라고 덧붙였다.
선생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원래 나는 소설 쓰기를 배우려다 문창과 야간반이 없어 시나리오 학원에 들어왔는데 너무 분위기에 휩쓸린 것 같았다. 그런저런 생각 끝에 시간 날 때마다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배우지 못한 ‘묘사’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후에 나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소설을 쓰겠다’ 결심해 [연서]라는 책을 출간했다.
어느 날 밤 영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첫마디가 이랬다.
“형, 섹스해봤지?”
황당한 질문이지만 글쟁이는 글쟁이의 습성을 안다.
“애까지 있는데 당연히 해봤지.”
“형, 나 좀 도와줘.”
“차분하게 말해 봐라. 뭔 말인지 알아야 도와주지.”
들어보니 영희가 취직한 곳에서 섹스 코미디를 기획했다. 보조 작가들이 몇 꼭지씩 쓰기로 했는데 영희는 경험조차 없는 처녀였다.
“쓰기는 했냐?”
“응. 내가 메일로 보낼 테니 형이 검토해 줘.”
메일로 보내온 시나리오를 읽어 보니 기가 찼다. 아무리 읽어도 섹스는 떠오르지 않고 씨름 선수가 레슬링 하다 이종 격투기로 전환하는 것 같았다. 대신 써 주고 싶었지만 나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영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 해봤다고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영희에게 전화했다.
“영희야, 못 쓴다고 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럴 수 없어. 취직하고 처음 맡은 일인데...”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철수가 떠올랐다. 철수가 쓴 시나리오를 거의 다 읽었는데 섹스 장면이 많았다.
“그럼, 철수에게 부탁해 봐. 철수가 이런 장면을 잘 쓰는 것 같더라.”
소개하면서도 괜히 미안했다. 철수가 난봉꾼으로 오해받을까 봐.
학원에서 철수를 만났을 때 슬며시 물어봤다.
“영희에게서 전화 왔지...”
“형이 알려줬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철수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두드렸다.
“잘했어. 그쪽 방면은 내가 전문이지. 비디오 대여점 하면서 그런 영화는 천 편도 넘게 봤을 거야. 내가 손 봐줬는데 잘 썼다고 칭찬 들어서 밥 쏘겠다고 전화 왔어.”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아련한 로맨스를 잘 쓰는 영희가 밥 벌어먹겠다고 해본 적도 없는 섹스 코미디를 써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일 년쯤 지나 영화가 개봉됐다. 예상대로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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