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원에서 처음 쓴 시나리오
# 아파트 풍경(낯)
허름한 아파트 단지 전경, 뒤에 있는 산, 내려오며 나무, 단지의 잔디밭, 놀이터, 그네, 그네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해와 그녀의 머리 사이에 타이틀 오른다. 혀의 길.
# 대기업 빌딩 복도(낯)
반짝 반짝 빛나는 대리석 복도. 일렬로 늘어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세 사람의 다리. 세 명이 긴장하여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오미터 앞에 세 사람. 또 오미터 앞에 세 사람. 총 9명의 사람이 일정한 간격으로 긴 복도에 서서 면접 대기하고 있다.
부동자세, 긴장된 표정들. 복도를 따라 나아가면 맨 앞 세 사람을 지나 오른 쪽에 면접장이 있다.
# 면접장
등을 보이고 있는 피면접자 세 사람. 얼굴을 보이고 있는 면접관 세 사람. 중년의 신사들. 중후한 표정. 왼쪽부터 면접관1, 면접관2, 면접관3. 맨 왼쪽의 면접관3이 가장 상사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관찰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표정.
피면접자 세 사람. 갓 대학을 졸업한 앳띤 얼굴. 새 양복 차림이다. 양쪽 피면접자는 긴장을 감출 수 없는 듯 가늘게 다리를 떨고 있다. 가운데 원석은 굳어있으나 당당한 표정이다.
면접관1: 김범석씨는 만약 상사가 직무상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김범석: (다리를 떨며, 떨리는 목소리로) 윗 분의 말씀이니 일단 수용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면접관1: 최원석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석: 생각에는 상, 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더 협의해서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겠습니다.
면접관3: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럼 부모님이 시키는 것도 따져 봐서 옳은 것만 하나?
원석: (잠시 생각하다가) 예, 부모님이 시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평등하니까...
면접관3 옆의 면접관2를 보며 실소를 짓는다.
면접관3: (혼자 말처럼, 그러나 다 들리게) 요새 애들은 겉멋만 들어서 안된다니까. 뭐, 마음이 평등해?
원석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인다. 다시 들며 발끈한 표정.
원석: (혼자 말처럼, 그러나 다 들리게) 옛날 사람들은 저래서 안된다니까. 자기만 옳은 줄 알아...
면접관들 일제히 얼굴 표정 궂어진다. 면접관3 면접쉬트 위에 <불합격, 인성불량>이라고 거칠게 갈겨 쓴다(클로즈 업).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석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
면접관3: (언성이 높아지며) 자네 어디 가나, 여기 장난치러 왔어?
원석: (나가다 뒤 돌아보며) 면접관들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니 저도 이 회사에 대한 제 결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마음의 평등입니다.
# 아파트 놀이터(저녁)
아파트 놀이터 여전히 뒷 모습만 보인 채 여자가 그네에 앉아 있다. 하늘이 석양
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다.
# 라이브 카페(밤)
생음악을 하는 라이브 카페. 무대 위에서 기타를 치며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쪽 저쪽 테이블을 비추면 열에 들떠 이야기 하는 사람, 소녀처럼 음악 감상하는 사람, 만취되어 졸고 있는 사람, 한 구석에 원석과 의철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옆 테이블에 여자 둘이 앉아 있다.
의철: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고 열심히 설득하는 모습)
원석아, 나랑 같이 가자. 어차피 우리 전공은 외국에서 학위받아 오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해. 좋은 기회야. 부모님께도 허락받았어. 너랑 같이 가도 좋다고 하셨어. 숙식은 내가 해결할게.
원석: (몸을 뒤로 제치고 생맥주를 마시며)
싫어. 넌 공부가 지겹지도 않냐.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더 해. 나는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느끼고 싶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공부를 할 거야.
의철: (실망하여 몸을 바로 세우며)
네 재능이 아까워서 그래. 교수님들도 너는 인정하시잖아. 너는 공부를 더 해야 해. 기회도 좋아. 미국대학에서 장학금도 주니까...
원석: (단호하면서도 미소짓는 표정으로)
의철아, 너 원효와 의상 이야기 알지?
의철, 왠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원석: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길이었어. 갑자기 비가 와서...
# 비오는 숲속(저녁)
개나리 봇짐을 메고 숲속을 뛰어가는 원효와 의상의 모습. 동굴을 찾아 허겁지겁 들어간다. 빗물을 털고 잠을 청하는 모습. 원석의 목소리 나레이션으로 들린다.
원석: <NA> (원효와 의상의 잠자는 모습) 동굴을 찾아 들어가 잠을 자는 데 원효가 한밤중에 갈증 때문에 잠에서 깼어.
잠결에 동굴 이쪽 저쪽을 뒤지는 원효의 모습. 구석에서 그릇이 손에 잡힌다. 들어 벌컥 벌컥 마시는 원효의 모습. 다시 잠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길 떠날 차비를 하는 원효와 의상의 모습. 원효 한 구석에서 해골을 발견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원석의 나레이션 들린다.
원석: <NA> 다음날 아침 길 떠날 차비를 하다, 자기가 마신 물이 해골에 고여있던 빗물인 걸 안거야. 구역질을 하다 깨달았대.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 라이브 카페
원석: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상보다 뛰어난 고승이 돼. 마음이 자기와 함께 있는 데 굳이 유학가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야...
원석 테이블에서 마른 오징어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구둣발로 짓밟더니 비벼댄다. 다시 들어 찢어서 태연하게 먹는다. 옆에 앉은 여자들 끔찍한 표정을 짓는다.
원석: (오징어를 씹으며)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야. 싫은 것도 싫지 않을 수 있고, 좋은 것이 좋지 않을 수 있고... 마음을 비우면 세상 만사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의철: (원석의 맥주잔을 자기 앞으로 옮기며) 원석아 너, 취했다. 그만 마셔.
원석: (의철 앞에 놓은 맥주잔을 들어 벌컥 벌컥 마시고 씩 웃는다)
나 안 취했어. 취하는 것도 결국 마음의 문제야.
원석 일어나 옆자리에 앉은 여자 둘의 자리에 합석한다. 여자들 놀라고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의철이 급히 쫒아가 사과한다.
의철: (원석을 쫓아가 옆자리에 앉으며) 죄송합니다. 친구가 술에 취해서... 저희들 나쁜 사람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4학년입니다. 실례되지 않으면 저희와 함께 술 한잔 하시죠.
말끔한 양복차람의 의철은 지적으로 보이며 키도 크고 멋있다. 여자들 의철과 원석의 대조되는 모습에 재미난 표정을 지으며 합석을 인정한다. 의철 자리에 앉는다.
원석: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의철아, 나 술 안 취했어.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보며) 아가씨. 오늘 같이 즐겁게 놀아봅시다.
여자1: (원석의 손을 내리며, 웃는다) 재미난 아저씨네...
자기 친구를 보고 얼굴을 살짝 찡그려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 원석 몽롱한 표정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을 올려다본다.
# 시장, 생선좌판 뒤(낯, 회상)
조명과 오버랩되어 태양이 비추다 시장과 한 구석 생선 좌판대를 비춘다. 좌판 뒤에는 생선장수 아주머니(원석 어머니)와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학생 차림의 여자(선영, 원석 애인)가 앉아 있다. 선영이 원석어머니를 설득하고 있다.
선영: 어머니 진지 잡숫고 오세요. 저도 생선값 다 안다니까요. 동태는 세 마리 이천원, 갈치는 두 마리 삼천원...
원석어머니: (주위를 부끄러운 듯 살피며) 아, 애가 싫다니까 왜 그래. 그러지 말고 빨리 들어가서 공부해. 젊잖은 규수가 이런 데 오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선영: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싫어요. 어머니 식사하고 오시기 전에는 안 갈 거예요.
원석어머니: 무슨 젊은 애가 이렇게 황소고집이람. 너 자꾸 고집 피우면 원석이더러 색시 삼지 말라고 그런다.
선영: (앞치마를 두루며) 좋아요. 원석씨한테 시집 안가도 좋으니 대신 어머니는 식사하고 오세요.
원석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이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 아파트 놀이터(낯, 회상)
원석과 원석의 애인 선영, 그네를 타고 앉아있다. 카메라 앞에서 찍는다.
선영: (앞을 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원석씨가 공부 더 하고 싶어하는 거 알아. 하지만 취직해야 해. 집에서도 빨리 결혼식 올리라고 성화가 심해. 원석씨도 어머니 계속 생선장수 하시게 둘 수 없잖아...
원석, 대답없이 앉은 채로 발을 굴러 그네를 탄다. 그네를 따라 화면 출렁이며 하늘, 하늘의 해를 비춘다.
# 아파트 길(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래가 흐르며 멀리서부터 술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원석 걸어온다.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 면접을 위해 입은 옷이 다 구겨지고 넥타이도 반쯤 풀어져 있다. 놀이터를 지나다 낯에 선영이 앉아있던 그네를 보니 여자가 앉아있다. 그네에 앉아 있는 여자는 뒷 모습만 보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긴 생머리로 여자의 옆얼굴 가려져있다. 원석 지나치려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의 옆에 앉는다. 여자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하늘 아래 그네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 사물이 뚜렷하지 않은 어두운 배경.
원석: (술 취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속 상한 일이라도 있나보죠. 이렇게 늦은 밤에 혼자서...
여자 반응이 없자 원석 헛기침을 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원석: (혼자말처럼) 외로운 분이시군요. 저도 외롭습니다. 사방 천지를 둘러봐도 제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애인까지도... 이해하지 않는 건 강요고, 폭력이야. 나는 이제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싫어... 그게 어머니 건, 애인이 건, 친구 건...
말을 하며 원석 달을 보다 그네에 앉은 채 그네를 끌어 여자에게로 다가간다.
원석: 왠지 첫인상이 친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랑 사귀어보지 않을래요. 저 군대 제대한 대학교 4학년 학생이고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저 제 마음을 이해해줄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예요. 그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 말대로 할 거예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말을 하며 슬며시 여자의 손을 잡는다. 여자 뿌리치지 않자, 원석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 라이브카페(밤, 회상)
술이 만취한 원석 다시 옆의 여자 어깨에 손을 올린다. 여자에게 뭐라 귓속말로 소근거린다.
여자1: (벌떡 일어서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2: 영숙아, 왜 그래?
여자1: 글쎄 같이 자재. 그리고 결혼하재. 뭐, 모든 게 마음의 문제라나. 야, 숫제 꼴리면 꼴린다고 해라.
여자 화를 못참겠는 지 앞에 있는 맥주잔을 들어 원석의 얼굴에 뿌린다. 의철 당혹스런 표정으로 쳐다만보고 있다.
# 아파트 놀이터 그네 (밤, 여자와 앉아있는 장면으로 돌아옴)
원석 더욱 용기를 내서 이번에는 여자의 어깨를 감싼다. 여자,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다. 원석 여자 얼굴을 세워 입 맞추다 그네에서 벌떡 일어난다. 원석의 그네 출렁인다.
원석: (여자의 손을 잡아끌며) 갑시다.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 한번 화끈하게 사귀어 봅시다.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 아파트 단지 한편 잔디밭
원석 여자의 손을 잡아끌어 아파트 단지 한편 으슥한 잔디밭으로 간다. 여자 원석이 끄는 대로 수동적으로 끌려간다. 잔디밭에 이르자 원석 사방을 살핀다. 아파트는 떨어져 있고, 주위에 사람도 없다. 원석, 흥분한 숨소리, 흥분한 표정. 다짜고짜 여자를 눕히고 여자의 얼굴에 키스를 퍼붓고 혀로 핱는다. 여자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팬티를 끄집어 내리고, 허겁지겁 자기 혁대를 끄르고 바지만 약간 내린다. 원석의 엉덩이 보이고 원석이 위에서 급하고 거칠게 움직인다. 여자 수동적으로 원석이 하는 데로 가만히 누워 있다.
원석 무너지듯 여자의 옆으로 누워 바지를 추스른다.
원석: (힘 들고, 잠에 빠져드는 목소리) 이제 첫 단추를 끌렀으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원석 술 기운에 지쳐 잠이 든다. 여자 원석이 떨어질 때 상태 그대로 누워 있다. 어두운 밤하늘, 점차 밝은 빛으로 바뀌며 날이 밝는다.
# 잔디밭(아침)
원석의 얼굴. 원석 눈을 뜬다. 누운 채 주위를 살피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선다.
원석: (혼자말로) 내가 왜 여기있지. 아, 어제 술에 취해서... 그네 타던 여자랑... 생각이 여자에 미친 원석 다시 주위를 살펴본다. 여자 가지 않고 어제 그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다. 아침에 보니 여자는 남루한 차림, 중년의 여자 거지였다.
원석: (깜짝 놀라 구역질 나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미쳤지. 더러운 거지랑 그짓을 하다니...
원석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다 이상한 듯 고개를 돌린다. 아무래도 잠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이상하다. 원석, 조심스럽게 걸인에게 다가간다.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다. 걸인의 얼굴에 그물처럼 굵은 자국이 이리저리 나 있다.
# 잔디밭(밤, 회상)
서둘러 거칠게 여자의 입에 키스하고 얼굴을 핥는 장면. 혀가 핥을 때마다 얼굴에 묻은 때가 지어지며 혀의 길(자국)이 생긴다. 이번에는 느리고 뚜렷하게 보여준다.
# 잔디밭(아침)
여자의 얼굴에 난 무늬가 혀 자국인 것을 안 원석 구역질 나는 표정을 짓다 뒤돌아서 비틀비틀 뛰어 도망친다. 아스팔트 길가까지 간 원석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선 채로 구역질하며 급작스럽게 토한다. 길 위에 떨어지는 토사물. 원석 쭈그려 앉으며 계속 구역질을 한다. 구역질하는 원석의 모습 작아지며 하늘의 해가 보인다. 밝은 해의 모습에 어두운 해골의 모습 점점 뚜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