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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학원 생활

- 다채로운 후배들

by allwriting

한 달 정도 지나자 시나리오 학원 생활이 익숙해졌다. 각자 써온 시나리오를 읽고 합평하는 시간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장르는 SF부터 로맨스까지 다양했다. 그날의 발표자가 교탁 앞에 서 있으면 시나리오를 읽은 학생들이 하나둘 손을 들어 질문하거나 비판했다. 비판은 날카로웠고 혹독했다. 처음에는 웃음으로 대답하던 발표자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면서 매섭게 반격했다. 반격에 재반격. 마치 보이지 않는 창과 방패로 싸우는 것 같았다. 울음을 터뜨리는 발표자도 있었다. 몇 개월 동안 온 정성을 다해 쓴 시나리오가 인정받지 못하자 분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글의 세계는 다양했고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은 다채로웠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던 내게는 신세계였다.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었다.


나는 반장 김철수와 친해졌다. 나이도 적지 않은 친구가 “형” 하며 붙임성 있게 구는 모습이 좋았다. 수업이 끝나면 철수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친해지면서 철수의 속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형이 부러워.”

“왜?”

“형은 회사 다니면서 글 쓰잖아. 나는 회사 다니면 여기서 글 안 써.”

철수는 명문대를 나왔지만 취직이 안 돼 비디오 대여점을 하다 차라리 시나리오 작가를 하자는 생각이 들어 학원에 들어왔다. ‘회사 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 하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철수가 나보다 더 괴로울 테니까. 대신 술을 한 잔 따라줬다.


시나리오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아니, 그보다 심했다. 극한 상황 속에서 글 하나 붙잡고 생활하는 친구가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만 원씩 걷어서 회식했다. 그 만 원도 없어서 그냥 가려는 사람이 있었지만 친구들이 “괜찮아” 하면서 끌고 갔다. 안주는 양 많은 두부김치나 감자탕을 시켰지만 술병은 순식간에 쌓여갔다.


고영희란 친구가 있었다. 시나리오를 잘 썼다. 로맨스였는데 나이도 어린 친구가 섬세한 정서를 잘 표현했다. 영희는 회식 때만 되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했다. 보다 못해 한마디 하자 영희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 내가 여기 어떻게 오는지 모르지. 아침도, 점심도 굶고 돈을 아껴서 참석하는 거야. 그러니 여기서 많이 먹어야지.”

영희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루는 분위기가 가열되 2차까지 갔다. 2차는 그나마 월급 받는 내가 냈다. 2차가 끝나자 새벽이었다. 다들 어떻게 가나 걱정하는데 철수가 여인숙 가자고 했다. 정말 대학생 시절 보던 여인숙이었다. 방 하나에 여덟 명이 들어가 앉아 사 온 소주와 마른안주를 놓고 이야기했다.

“너, 취직했다며?”

철수가 학교 후배 순희에게 물었다. 늘 고동색 추리닝만 입고 다니는 아이였다.

“응.”

“어디?”

한참을 망설이던 순희가 대답했다.

“서비스업이야.”

“서비스업, 어디?”

철수가 짓궂게 계속 물었다.

“노래방 도우미.”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철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얼굴에 노래방 도우미가 가당키나 하냐? 그건 손님 학대다. 손님 학대.”

지켜보던 친구들이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술잔을 부딪혔다. 웃으며 술을 마시면서도 서글펐다. 아니, 서글프면서 즐거웠다. 어쨌든 꿈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현실은 팍팍했지만 글은 아름다웠다. 나는 영희가 쓴 시나리오를 읽고 감동받아 시를 썼다. 시나리오는 현대에 사는 남자가 일제강점기에 사는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거울을 통해서만 여자를 볼 수 있다.



거울 속 그대


자개문양 고색이 아름다운 화장대

거울 속에 웃고 있다

머리 빗는 모습이 청순해

한참을 숨죽여 봐도 알지 못하고

웃는 네 뒤로

꽃잎 넣은 화선지문

물결 흔들리는 우물과

바람 불 때마다

수 만 갈래로 흩어지며 햇빛을 난반사하는

키 큰 미류나무

잎, 잎이 내게 손짓하는 듯해


거울 속 너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


너를 보며

웃고 있는 내 뒤로

조선 소나무 한 그루

오래전 솟대처럼 높게 솟아있고

그 소나무에 흰 새가 날아와

잠시

앉았다 떠나는 시간 동안

부칠 곳 없는 편지를 쓴다


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거울 이편의 나는

거울 저편의 너를

그렇게 사랑하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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