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집념 01화

기억하다.

by 로지

겨울의 끝자락,

봄이 되기엔 언제나 그러하듯 더디고 진지하게 찬바람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2월과 3월 그리고 4월까지도 일 년 중 가장 추운 달로 기억된다.

한 겨울 늦은 밤에 태어난 나는 사실 추위에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과는 다른 온도 차로 여름엔 녹초가 되어 가장 힘겨운 시기를 지내기 때문이다.

빨갛게 달궈지는 얼굴은 쉽사리 진정되지도 않아서 병력이 의심되는 정도다.

달리기.

뛰는 것을 즐기는 나는 여름엔 시도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얼음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이 때문이다.

치아에 손상이 가기도 하고 몸에 이롭지도 않은 얼음을 끊어야 하는 시절은 괴로웠다.

아직까지도 얼음을 입안 가득 물고 천천히 녹여가며 즐기는 시간은 달콤하다.

따뜻한 차의 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나아질까. 이대로 시원하고 청량함만 즐길 수 있는 지금에 멈췄으면 좋겠다.


시간은 스치듯 날아간다.

조금만 천천히 흐른다면 내가 달랐을까.


그는 내게 때로는 천사와 같이 선한 영향력을 심어주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줬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도록, 미소를 머금은 나의 얼굴이 유리에 비춰서 아름답도록 만들었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그 시절이 환하게 채색되듯이 나도 똑같았다. 그래서 더 행복했다.

믿음과 신뢰 그런 것쯤은 사랑에 동반된 부속물일 뿐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쯤으로 순위가 바뀌었다.

그 또한 사랑에 빠진 누군가라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함께하는 동안 산만하지도 않았다. 연기를 특별히 잘해 내어서 티가 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이 아니었으니 그는 불안한 일 따윈 없었으니까.


그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의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갑자기 내가 나타나게 된 것이지만.

놀람 보단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내가 함께 있었으니까.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오히려 충분한 의심을 사게 되었을 터.

블루투스를 통해 사방에 번졌던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함과 흥분함의 기운까지 번졌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연결된 통화라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긴장감과 어색함 그 중간 어딘가의 떨리는 목소리는 최대한 고쳐 잡으려는 자세까지 읽게 해 주었다.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완전하게 낯설지 않은 이름과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일지가 되었다.

끊고 난 다음의 당연한 나의 질문은 날카롭진 않았다.

"누구야?"

잠시 잠깐의 머뭇거림 후 그의 대답은

"헤어진 전 여자 친구..."

짤막한 대답 뒤 더 이상의 질문을 거부하는 표정에 나도 더 이상의 것을 묻고 싶지 않았다.

나와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 오래된 여자친구를 정리한 사실이 있다.

둘 사이를 알고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금세 도착한 목적지에서 내리는 나를 잡는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 상태가 아니었던 내 모습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간간히 전화가 왔었고 그럴 때마다 무시했다. 간혹 받기도 했지만 그저 아직 혼란에 빠져있는 그녀를 달래주는 것뿐이었고 감수해야 했다. 왜냐하면 유지원에게 집중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버림받은 그녀에게 나름의 매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라는 변명을 했다.

기간이라는 게 있었을 거다. 나와의 시간에 침범해 있던 그녀와의 그런 시간을 나눈 기간.

그 기간 내내 내게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사정을 알게 되니 그때부턴 화가 났다.

내가 몰랐던 그 기간의 그의 비밀스러운 행보가 나를 짓눌렀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에 어떤 일이었어도, 그 이상의 일이 있었어도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줬을 거다. 그 점에 화가 났다.

사랑은 이토록 분노를 동반한다.

그동안 책에서, 영화에서, 노래 가사에서 수없이 학습된 그 내용들을 그대로 겪는다고 생각하니 더 참을 수 없는 화가 생성됐다.

질투와 시기였을 거다. 나 말고 그 전의 여자친구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차오르도록 해야 하는 질문들이 순번까지 정해지며 줄을 섰다.

하지만 그대로 내뱉을 수 없는 그녀의 관한 궁금증들.

급격하게 줄어든 말 수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그는 난감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벌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있었던 둘 사이의 관계를 혼자서만 모르고 있었다는 게 약이 올랐다.

평상시에 나누던 잠들기 전 달콤한 속삭임 속 대화는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어느 세상 속 그 한가운데에 그를 빠뜨리고 혼자만 생존해 있는 기분이다.

새벽녘 눈물이 차오르도록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조차 왜인지 모르겠다.

뭐가 억울할까? 그럴 수도 있다는 이해함이 절반 아니 전부.

그러나 내게도 그 내용을 전달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속은 기분과 완전한 배신 그 사이를 시소게임하듯이 반복한다.

아무래도 난 헤어 나오기 힘들 것 같다. 너무 그를 사랑하는 걸까?

알고 있었지만 혼자만의 고독함이 너무 짙어진다.


어쩌면 누군가가 지도해 주듯이 내가 읽던 안 읽던 사과와 변명으로 얼룩진 문자로 핸드폰이 뜨거워져야 했다. 예상과는 달리 아니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몇 문장 되지 않은 문자 한 통이 전부였다.

눈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당당한 자세인 걸까?

헷갈리게 만드는 그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적어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더 보여준다면 대화의 시작을 열어볼 수 있었는데 오히려 원하지 않은 듯 한 그의 반응이 어지럽기까지 한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불현듯 그녀가 나의 sns를 염탐했을 것 같은 생각에 계정을 열어보았다.

어딘가 매력적이지 않아 보인다면 그게 어느 지점일까 면밀하게 찾아보게 되었다.

함께 얼굴을 드러낸 사진은 없지만

그와 나눈 음식과 커피, 풍경과 커플을 증명하는 그림자 사진 등을 그녀는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입장을 바꿔 본다면 그런 지옥 같은 시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한참을 무의미하게 들여다보던 나는 메시지가 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가 보냈다.

무려 세 달 전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우진 씨의 전 약혼녀 한지은입니다.

실례인 줄 알지만 무릅쓰고 보냅니다.

5년간 우진 씨와 저는 진지한 만남을 이어왔고 결혼도 자연스럽게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양가 어른들과의 허락도 마친 관계였지만 유지원 씨로 인해서 저는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에겐 오랜 추억과 시간을 나눈 만큼 깊은 슬픔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지만

우진 씨의 행복을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더 이상 우진 씨와는 원활한 대화가 이어질 수 없기에 유지원 씨 와의 소통이 필요합니다.

유지원 씨도 저에 대하여 아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전화 주신다면 부담스럽지 않은 만남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부디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진 씨에게는 비밀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와 유지원 씨와의 대면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믿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010-****-5943 한지은


뒷자리가 그와 같은 커플 번호였다.

그에게 당장 내용을 복사하여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지만 일단 생각을 하기로 했다.

내게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일지 잘 가늠이 안된다.

이대로 연락을 해서 만나야 할까?

가슴이 요동치고 손이 떨리는 것 같다.

입술이 말라와서 무엇이든 마셔야겠다.


전 약혼녀.

강력한 한 방이다.

전 여자친구로 본인을 소개하지 않은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더 자극적은 표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진 씨는 날이 잔뜩 선 내게 문자와 전화를 하느라 바쁘지만 난 아무 반응을 할 수 없다.


주연이를 불러서 독주 한 잔을 마셔야겠다.

혼자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평소와 달리 예민해 보이는 내가 주연이는 무척이나 신경 쓰일 거다.

어쩔 수 없이 서로의 기류를 읽어내는 사이라서 숨겨지지도 않는다.

"왜?" 다른 나를 느낀 거두절미 한 질문부터 던진다.

"뭐가?" 아닌 척한 대답을 반사적으로 해봤지만 소용없다.

"우진 씨와 한참 핑크색이면서 무슨 일로 어두운 기색이냐고" 주연이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의기롭다.

"사랑은 그런 거지 뭐" 까칠한 표정과 무심한 표현에 주연이의 눈빛이 진해진다.

그냥이 아닌걸 눈치챘지만 이내 다른 이야기로 전환하는 기술이 돋보인다.

한 발짝씩 떨어져서 서로의 연애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는 우리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방법을 꺼내 쓴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