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만 아는 한 가지 마음속 단어_19

부끄럽다

by 맑은날의 무지개

나는 사실 무척이나 자주 삐지는 사람이야.

물론 안 그래 보이는 것 알아, 듬직하고 차분하고 때로는 인자해 보이기도 해서

나랑 [삐짐]이라는 단어는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 같지.

하지만

꽤 친하게 지내는 단어 중 하나 야.

하나라는 단어가 나와서 그런데, 예전에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좋아하던 누나 이름이 "이하나"이었는데

정말 딱 교회누나 타입이야

안경 쓰고 조용한듯 하지만 두루두루 잘 지내고 활발한 친구 옆에 배시시 웃고 있는 타입이지

그 당시에는 누나들 왜 이렇게 좋아했는지 몰라.

나는 외동이지만 (이것도 사람들이 정말 의외라고 한다. 어릴 때는 성격이 거지 같아서이고 나이 들어서는 그 반대 이유로;;)

한두 살 차이 나는 친척 형들이 10명쯤 있어.

처음엔 5명인 줄 알았는데, 결혼해서 아이도 있던 분들도 촌수로 다 형들이더라고.. 한참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야

여하튼 그래서 친척 모임에 가도 다 남자뿐이고 해서 그런지 누나들이 좋았어.

그렇다고 표현이나 할 줄 아는 그런 애는 아니었고, 정말 정말 존재감 없이 한 달을 교회 안 나가도 모를 만한

조용하고 그저 그런 아이였지.

그런 아이가 누굴 좋아해 봤자 티가 나겠어.

그럼 티는 나지 ㅎㅎ

누굴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거잖아.

불 꺼진 방에 홀로 웅그린 이불 속에서도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처럼

숨길 수 없는 것.

그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지.

좋아한다는 것은 긍정의 감정임이 틀림없는데, 그래서인지 질투하는 녀석들이 많은 것 같아

평소라면 커피를 끓이려고 올려둔 물이 펄펄 끓어오르고 다시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도

무신경할 일들이 조마조마하게 다가와서

끓어오르는 물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마주하게 되어서

순간 삐져.

앗 뜨거!! 하며 놀라 손을 빼듯 감정을 빼고는 하지.

빼버리고 숨긴 감정을 물이 식은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슬며시 그 자리로 돌아오지만

그걸 본 상대방은 어떨까 싶어.

삐진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참 이기적인 마음이야.

좋아해서 삐지는 거야!! 라며 정당성을 외치고

그러니까 이해해줘!! 라며 타당성을 보이지만

그건 내 사정이지.

(나 좀 T 같았지??)

그래도 좋아한다는 것은 그건 네 사정이야~ 라고 말하는 T도 "으이구~ 알았다 알았어!!" 하고

달래줄 수 있는 것 같아.

티가 이해할 수 없는 에프가 되고 에프가 부럽지 않은 티가 되는 모습이지.

그래서 나 좀 T 같은가? ㅎㅎ

지금은 살아는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이지만

그래도 그때는 명절이면 신나게 놀았던 친척 형들 사이에서 느끼지 못했던 누나의 따스함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아.

오랜 시간 좋아한 것도 아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나는 그 따스함을 엄한 사람에게 갈구한 것이지만

채워진 적은 없던 것 같아.

채우려는 노력도 아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을 그때의 나.

그때도 많이 삐졌겠지.

남녀노소 안 가리고 삐졌을 거야, 아마

그때는 나는 100도의 물보다 더 뜨겁지만 늘 끓고 있어서 아무 곳에도 쓸 수 없었거든.

나의 감정은.

한동안 나는 안 삐지는 삶을 사는 줄 알았어.

삐질 이유가 있나 싶기도 했고, 삐져서 뭐하나 싶기도 했는데

요즘은 나도 모르게 삐지는 것 같아.

그 안에 담겨진 감정들을, 내 안에 담긴 이름을 알고 모르는 감정들을 다 같이

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삐지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

나는 아닌 거 같은데,

나를 나보다 더 잘 파악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맞을 거야.

상담을 배운 것은 난데, 그 사람의 사람을 파악하는 명철함은 정말 놀랍다니까.

그런 사람이 나를 정리해서 알려주면 나는 너무 좋아.

내 뒤에 딱 붙은 나의 볼 수 없던 모습을 알려주곤 하거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를 다시 바라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

너는 어때? 잘 삐져??

[삐짐]이라는 단어는 유치하기도 하지만 사랑스럽기도 하다.

빠져야만 생기는 단어 같아.

사람과 사람, 사람과 반려 존재 혹은 사람과 감정

어떤 관계이든 어떤 대상이든 간에 [빠짐]이 있어야 [삐짐]이 생길 수 있는 단계로 이어진다고 생각해

나는 잘 빠진다.

밀어내기도 잘하지만 빠지는 것도 잘 해.

그렇다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디나 빠지는 것은 아니야!!

여기저기 빠질 만큼 풍성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지만

일단 빠지면 그 안에 쏙 들어가서 나가기 싫을만큼 집돌이야

그래서 자꾸 삐지나 봐

나만 따라다니는 우리 집 막내멍이가 나자는 사이 딴 방가서 자고 있어도 삐진다.

그러고 보니 나 엄청 잘 삐지네..--;;

사십대 아저씨의 삐짐일상이라니 쓰고 나니 조금 부끄럽지만,

내일도 여전히 삐질 테니 그냥 부끄러워할래.



부끄럽다_스스러움을 느끼어 매우 수줍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만 아는 한 가지 마음속 단어_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