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다
나는 사실 무척이나 자주 삐지는 사람이야.
물론 안 그래 보이는 것 알아, 듬직하고 차분하고 때로는 인자해 보이기도 해서
나랑 [삐짐]이라는 단어는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 같지.
하지만
꽤 친하게 지내는 단어 중 하나 야.
하나라는 단어가 나와서 그런데, 예전에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좋아하던 누나 이름이 "이하나"이었는데
정말 딱 교회누나 타입이야
안경 쓰고 조용한듯 하지만 두루두루 잘 지내고 활발한 친구 옆에 배시시 웃고 있는 타입이지
그 당시에는 누나들 왜 이렇게 좋아했는지 몰라.
나는 외동이지만 (이것도 사람들이 정말 의외라고 한다. 어릴 때는 성격이 거지 같아서이고 나이 들어서는 그 반대 이유로;;)
한두 살 차이 나는 친척 형들이 10명쯤 있어.
처음엔 5명인 줄 알았는데, 결혼해서 아이도 있던 분들도 촌수로 다 형들이더라고.. 한참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야
여하튼 그래서 친척 모임에 가도 다 남자뿐이고 해서 그런지 누나들이 좋았어.
그렇다고 표현이나 할 줄 아는 그런 애는 아니었고, 정말 정말 존재감 없이 한 달을 교회 안 나가도 모를 만한
조용하고 그저 그런 아이였지.
그런 아이가 누굴 좋아해 봤자 티가 나겠어.
그럼 티는 나지 ㅎㅎ
누굴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거잖아.
불 꺼진 방에 홀로 웅그린 이불 속에서도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처럼
숨길 수 없는 것.
그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지.
좋아한다는 것은 긍정의 감정임이 틀림없는데, 그래서인지 질투하는 녀석들이 많은 것 같아
평소라면 커피를 끓이려고 올려둔 물이 펄펄 끓어오르고 다시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도
무신경할 일들이 조마조마하게 다가와서
끓어오르는 물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마주하게 되어서
순간 삐져.
앗 뜨거!! 하며 놀라 손을 빼듯 감정을 빼고는 하지.
빼버리고 숨긴 감정을 물이 식은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슬며시 그 자리로 돌아오지만
그걸 본 상대방은 어떨까 싶어.
삐진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참 이기적인 마음이야.
좋아해서 삐지는 거야!! 라며 정당성을 외치고
그러니까 이해해줘!! 라며 타당성을 보이지만
그건 내 사정이지.
(나 좀 T 같았지??)
그래도 좋아한다는 것은 그건 네 사정이야~ 라고 말하는 T도 "으이구~ 알았다 알았어!!" 하고
달래줄 수 있는 것 같아.
티가 이해할 수 없는 에프가 되고 에프가 부럽지 않은 티가 되는 모습이지.
그래서 나 좀 T 같은가? ㅎㅎ
지금은 살아는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이지만
그래도 그때는 명절이면 신나게 놀았던 친척 형들 사이에서 느끼지 못했던 누나의 따스함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아.
오랜 시간 좋아한 것도 아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나는 그 따스함을 엄한 사람에게 갈구한 것이지만
채워진 적은 없던 것 같아.
채우려는 노력도 아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을 그때의 나.
그때도 많이 삐졌겠지.
남녀노소 안 가리고 삐졌을 거야, 아마
그때는 나는 100도의 물보다 더 뜨겁지만 늘 끓고 있어서 아무 곳에도 쓸 수 없었거든.
나의 감정은.
한동안 나는 안 삐지는 삶을 사는 줄 알았어.
삐질 이유가 있나 싶기도 했고, 삐져서 뭐하나 싶기도 했는데
요즘은 나도 모르게 삐지는 것 같아.
그 안에 담겨진 감정들을, 내 안에 담긴 이름을 알고 모르는 감정들을 다 같이
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삐지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
나는 아닌 거 같은데,
나를 나보다 더 잘 파악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맞을 거야.
상담을 배운 것은 난데, 그 사람의 사람을 파악하는 명철함은 정말 놀랍다니까.
그런 사람이 나를 정리해서 알려주면 나는 너무 좋아.
내 뒤에 딱 붙은 나의 볼 수 없던 모습을 알려주곤 하거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를 다시 바라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
너는 어때? 잘 삐져??
[삐짐]이라는 단어는 유치하기도 하지만 사랑스럽기도 하다.
빠져야만 생기는 단어 같아.
사람과 사람, 사람과 반려 존재 혹은 사람과 감정
어떤 관계이든 어떤 대상이든 간에 [빠짐]이 있어야 [삐짐]이 생길 수 있는 단계로 이어진다고 생각해
나는 잘 빠진다.
밀어내기도 잘하지만 빠지는 것도 잘 해.
그렇다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디나 빠지는 것은 아니야!!
여기저기 빠질 만큼 풍성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지만
일단 빠지면 그 안에 쏙 들어가서 나가기 싫을만큼 집돌이야
그래서 자꾸 삐지나 봐
나만 따라다니는 우리 집 막내멍이가 나자는 사이 딴 방가서 자고 있어도 삐진다.
그러고 보니 나 엄청 잘 삐지네..--;;
사십대 아저씨의 삐짐일상이라니 쓰고 나니 조금 부끄럽지만,
내일도 여전히 삐질 테니 그냥 부끄러워할래.
부끄럽다_스스러움을 느끼어 매우 수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