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새 산책러의 고백
자칭 나는 걷기 예찬자다. 틈만 나면 걷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는 날이면 회사 가까이에 있는 장충단 공원을 한 바퀴 걷고 사무실로 향한다. 점심때에도 짬을 내서 회사 건물 주변을 걷는다. 이렇게 걷는 나를 보고 주변 지인들은 ‘매일 만보는 걷지?’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아니, 만보는 안 돼.’라고 대답하고 나면 나는 괜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쑥스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운동은 나의 우선순위에서 늘 밀린다. 책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다 지겨울 때, 일이 잘 안 풀릴 때, 집안일을 마치고 여유가 생길 때, 해야 할 것을 다 한 뒤에야 운동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틈새 시간에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걷기였고, 그렇게 나는 틈새 산책러가 되었다.
내 시간의 중심에 걷기가 있지는 않지만 나는 걷기 예찬론자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의·약대 편입에 실패하고 자괴감에 빠졌을 때, 번아웃으로 삶이 무기력했을 때, 비현실적인 기대치에 스스로 억눌렀을 때,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질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나는 걷기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나는 에너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
사실 나는 주변의 영향을 쉽게 받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게다가 작은 실패에도 에너지를 방전해버리는 기질이었다. 장마에도 가뭄에도 물이 부족하지 않게 조절해 주는 댐처럼 내 내면의 균형을 잡아주는 마음의 댐이 필요한 상태였다. 과거 힘들었을 때 걸었던 것처럼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질 것 같을 때 걷는다. 의욕만 앞서 섣부른 행동을 할 것 같다면 나는 틈새 걷기를 통해 에너지를 조절한다. 주변 사람들의 성공을 보면서 부러움과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빠르게 걸으면서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보낸다. 걷는 동안 호흡이 깊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에너지가 순환되고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상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여유가 생긴다. 한결 차분해진 마음 덕분에 긍정적인 생각과 말이 나온다. 내가 멋지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 기분을 유지하고자 틈만 생기면 걷고 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사람들은 만보 걷기를 한다. 나는 여전히 만보는 걷지 못한다. 대신, 일상에서 틈이 생기면 걷는다. 내게 걸음 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나만의 시간, 나만의 속도로 걷는 것이 내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는 도구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요즘에 날씨가 좋아지면서 걷기에 참 좋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짬이 나면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걷는 목적이나 이유가 없어도, 만보를 걷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일단 그냥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