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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껌 좀 씹었어요...

그땐 제가 너무 어렸어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by 하율


“저 껌 좀 씹었어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무슨... 말씀인가요?”


그녀는 언제나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또렷한 이목구비, 단정한 정장 투피스 차림의 단아한 50대 수강생. 매번 강사의 간식까지 챙겨 오던 열정적인 학습자였다. 늦은 나이에 낳은 막내딸을 위해, 딸의 학습을 돕고자 강의를 들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정성 가득한 어머니였다.

12주 과정의 마지막 날, 그녀는 간절히 내게 부탁했다. 집으로 가서 딸을 만나 상담을 해달라고. 그리고 덧붙이며 말했다. “아이에게 문제가 좀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




드디어 첫 만남.

중학생인 그 아이는 착하고 예뻤다. ‘뭐가 문제라는 걸까?’ 하는 의문을 안은 채 거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오렌지 주스 두 잔을 가져다 놓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아이는 반에서 10등 정도 하는 성적에, 조용하고 성실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깔끔한 글씨. 다만 글자가 너무 작아 쉽게 읽기 어려울 정도.


그러던 중, 아이가 손을 움직이다가 실수로 주스 잔을 엎질렀다. 주황색 액체가 교과서와 노트를 타고 번졌다. 아이는 얼어붙은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어떡해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보통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재빨리 휴지나 수건을 가져와 닦으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엎질렀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잘 모르겠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좀 얼떨떨했다.

“괜찮아. 닦으면 되지 뭐. 저기 휴지 있네. 가져와서 닦아볼래?”

그제야 아이는 움직였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고 난 후, 어머니가 나오셨다. 손에는 두꺼운 파일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여기... 검사 결과들이에요.” 그녀가 가져온 파일을 펼치자, 첫 장에 HTP 검사 결과지가 있었다. HTP(집, 나무, 사람을 그리는 투사적 심리검사)는 개인의 무의식적 정서 상태를 평가하는 도구다. 그림을 보자마자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저기 상담센터, 정신과도 다 보내봤어요. 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어요. 선생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선생님이 하라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제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그때,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올 때 들고 나온 핸드백. 집 안에서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게 이상했다. 그리고 핸드백 지퍼 사이로 삐죽이 보이는 길쭉한 하얀 물체. 젓가락도, 볼펜도 아닌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유기예요.”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거실에서 우리가 상담하는 사이에 아이가 방에서 컴퓨터게임을 할까 봐 공유기를 뽑아 들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후 10주간 아이와 코칭을 진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나는 어머니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방학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도서관 자리를 맡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도서관에 데려다주고, 점심이면 도시락을 싸서 배달했다. 저녁에도 새 밥을 지어 다시 갖다 주고 마치면 데려왔다. 딸이 공부로 성공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은 사랑과 정성, 그러나 그 마음의 한편에는 통제와 집착도 있으리라.



10주 후, 어머니는 마무리 상담을 하며 담담히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 껌 좀 씹었어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요. 그래서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어요. 그 삶이 너무 한이 맺혀서... 내 딸만큼은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다가도 화가 나면 아이를 때려요. 한 시간, 두 시간 방에 가둬놓고 때려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자괴감이 들어요. 선생님, 우리 딸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숨을 삼켰다. ‘저렇게 고상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저 착하고 예쁜 딸을 폭행한다고?’ 머릿속이 아득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 후 분노를 억누르고 담담히 말했다.

“어머님이 상담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든의 『부모역할훈련』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거 일곱 번 읽고 연락 주세요. 그전에는 연락하지 마세요!” 30대 중반의 강사가 50대 어머니에게 호통을 쳤다. 강사인 나 자신도 두꺼워서 네 번밖에 읽지 못한 책을, 일곱 번 읽으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몇 달 후,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조용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편안한 느낌으로 말씀하셨다.


“저, 보육교사 공부 시작했어요. 교사가 되려는 건 아니고요. 15년 동안 놓친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생님이 권해주신 책, 일곱 번 다 읽었어요. 처음에는 선생님이 너무 모질다고 생각했는데, 오기로 읽고 또 읽다 보니 보이더라고요. 아이의 어린 시절을 다 놓쳤다는 걸. 그리고... 지금의 제 모습이... 저 자신도 상담받으며 돌보기 시작했어요.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녀는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가정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아는 것은 별로 없고 열정만 가득했던 애송이 강사. 정의에 불타는 미숙한 강사. 그녀의 살아온 인생을 더듬어 보며 아픔을 헤아려 주지는 못하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그렇게 냉정하고 무례하게 굴다니...


ㅇㅇ어머니!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너무 어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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