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베리의 6번째 이야기.
학부 때 '어떤' 작가가 될지 고민해보고 발표해야 했다. 때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이고, Freezing Rain이라는 우빙도 종종 내리던 곳이었다. Freezing Rain이란 비가 땅이나 나무와 같은 '물체'에 닿으면 바로 얼음으로 변하는 현상이다. 그날도 눈이 정말 많이 오기 시작했다. 수업은 교수님께서 빨리 집에 가라고 일찍 마쳐주셨다. 과제 양은 더 늘어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집에 일찍 간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눈 속을 걷다 보니 체육관 근처 나무들에서 새들이 맛있게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눈 속에 파묻혀있는 겨울 베리 (winterberry)였다. 그 순간 저 작디작은 베리처럼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 길로 당장 꼬박 하루 만에 아래 그림을 완성시켰다. 내가 길을 잃은 것 같을 때마다 꺼내보는 그림이다. 여담이지만 이 그림은 유독 탐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절대 팔지 않는다. 100억을 준다고 해도 안 팔 거다.
위의 그림을 그린 지도 근 10년이 넘어간다. 지나간 세월만큼 그림의 색감도 많이 바래졌다. 흘러간 시간만큼 잘해 오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더욱 '시작'과 '초심'이란 단어를 요즘 많이 생각해보는 것 같다. 과연 나는 잘해오고 있는 건가?
kinohi는 하와이어로 ‘시작’ 이란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하와이에서 창세기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인 Genesis를 가리키는 하와이어이기도 하다. 참고로 Genesis를 소리 나는 그대로 옮긴 하와이 단어는 Kenekike라고 한다. 하와이는 신들의 장소란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Hawai'i를 음절 단위로 의미를 나눠보면 ha는 숨결 혹은 삶의 숨결, wai는 물, 'i는 궁극의 존재인 창조자를 의미한다. 각 뜻을 합쳐보면 Hawai'i (하와이)는 우리가 간결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필요한 전부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가톨릭 신자에게 올바른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창세기의 주님이 자연을 창조하는 부분이 제일 맨 첫 장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시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자연이란 의미가 아닐까.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우리의 삶도 어제와 또 다른 오늘,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의 연속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매 순간 우리네 마음에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도 이렇게 시시각각 변화한다.
필자의 그림은 자연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한 것을 시각 언어로 기록한 것이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작가의 역할은 작가가 묵상한 것을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대입해볼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을 시적 추상이라고 필자는 정의 내린다. 각자 마음에 있는 것을 찬찬히 풀어내다 보면 그 자체로 자신만의 ‘시’를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하와이에서 잠시 이야기해 보았던 하와이안은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점들을 글 혹은 마음속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자신만의 시를 쓰는 것이라고 했다. 자칫 너무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놓치기 쉬운 자연을 바라보며 시를 쓰는 마음이 여유가 있어 보인다. 모든 것이 바쁘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낭만이다.
자신만의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간단한 안내글을 적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힘듦' 혹은 '고난'을 흔히 '겨울'이란 계절로 종종 비유하여 말한다.
각자의 '겨울' 즉 힘듦은 다 다르다. 어쩌면 반대로 '여름'이 힘든 이도 있을 것이다. 겨울이 힘든 이에겐 여름이, 그리고 여름이 힘든 이에겐 겨울이 항상 근처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언가 잘 풀릴 것이란 희망, 기대를 품고 버텨내는 것도 좋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거나 먹거나 하면서 잠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어도 좋다. 나의 그림이 편견 없이 많은 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마음의 위로를 건네며 다시 활기차게 새 출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그림으로 평안한 시간을 보냈다면, 작가로서 참 행복할 것 같다. 그렇기 위해선 나 먼저 세상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느끼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확실히 나이 먹을수록 사고와 마음의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여름 속 겨울'의 마음을 지니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