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대소동: This is not a drill.
그림의 왼쪽 위에는 겨울의 찬 기운을 잔뜩 머금은 비구름이 있다. 얼음장같이 찬 소나기가 내릴 것 같지만, 생명의 움을 틔우는 따뜻한 연둣빛 봄 소나기가 내린다. 생명의 비를 맞은 땅은 붉은 꽃을 피워내고 있다. 봄 소나기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자연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4년 전 잊지 못할 경험을 한 나는 여전히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대학원생 1년 차 첫가을 학기 내내 핵 미사일과 관련된 소식들과 이야기들로 평범한 일상을 가득 메웠다. 학교에서 관련 안내책자를 이메일로 보내주기도 했고, 미사일이 하와이에 도착할 시간은 20여분이라느니, 방공호로 적합한 곳의 조건들은 무엇인지, 방공호에 못 들어갈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살아남는지 등등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주제들이 넘쳐났다. 아무리 쉽게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주제들이 반복될수록 점차 불시에 진짜로 미사일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은연중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오전 8시 7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이 토요일은 학기 중에 몇 없는 과제나 시험 준비를 할 필요가 없는 아주 귀한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새벽 알람을 맞춰놓지도 않고 쥐 죽은 듯이 아침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별안간 휴대폰이 귀가 찢어질듯한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긴급재난문자 (Emergency Alert Systems)가 왔음을 알렸다. '아 진짜... 토요일 아침부터...... 너무 하네! 잠 좀 자고 싶다' 하면서 문자를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의 끝맺음은 'This is not a drill.'이었다.
'아니, 내가 뭘 본거야 지금?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긴 맞아?'
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말인데, 실제로 이 말이 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참고로 미국 학교에서는 시시때때로 긴급 대피 훈련을 실시한다. 미리 사전에 공지하고 실시하는 대피훈련과 갑자기 실시하는 대피 훈련이 있는데, 매번 반복 훈련 (drill)이라며 실제상황이 아님을 꼭 알려준다. 그러니 '실제상황'이라면서 날아오는 문자를 보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대피할 시간이 20분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떡하나 싶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공식적인 피난처나 방공호는 없다. 제일 확실한 대피 방법은 알아서 창문 없는 밀실에 물과 비상식량을 들고 들어가 72시간 동안 나오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 당황한 마음을 부여잡고 이 정도의 큰일이면 왠지 속보로 인터넷이 도배됐을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기사 검색하면서 상황을 판단해 보기로 했지만, 평상시에도 가뜩이나 느린 인터넷은 나무늘보가 움직이는 속도로 접속되고 있었다.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들어간 한국 뉴스 포털 사이트도 CNN 홈페이지도 인터넷 세상은 참 조용했다.
미사일이 오아후 섬에 도착한다면 어딜 가든 상황은 똑같을 것 같았다. 그냥 방 안에 있기로 했다. 왠지 모르지만 밖에 나가느니 기숙사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매 초 내가 들이켤 수 있는 공기가 너무 소중해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잔디가 촉촉할 때 자를 때만 나는 싱그러운 풀내음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내가 이렇게 생을 끝내기에는 억울했다. 보고 싶은 얼굴들도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좀 더 넓은 아량으로 다른 이들을 이해하며 살아갈 걸 후회도 됐다.
10여분이 지났을 때였다. 실제 상황이 닥치면 학교에서 이메일이랑 문자를 또 보내준다더니 학교 이메일과 문자는 감감무소식이다. 교내엔 왜 공습경보 사이렌이 안 울리는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서 더 이상했다. 최초 재난 문자를 받은 지 20분이 됐을 때였다. 미사일이 도착할 시간인데 엄청난 소음을 동반하는 '쾅' 이란 미사일이 떨어지는 소리도 안 들리고, 땅이나 건물은 안 흔들리는 건가. 기이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던 그때 최초로 보낸 미사일 공습 재난 문자는 잘못 보낸 것이라는 정정 문자가 날아왔다.
정정 문자를 보니 '이게 뭐야. 장난해?'라며 순간 욱하다가도 안도감이 몰려왔다.
「생은 그냥 살아지는 줄 알았는데 결단코 아니었다. 매 순간 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 1분 1초가 축복이고 기쁨이며 선물이다. 요즘 매일 악몽 꾸는데, 오늘 밤은 악몽 안 꾸고 잘 잘 수 있길.」
이라고 메모를 남겨두고 새로운 하루를 살았다.
4년이 지난 지금, 이젠 악몽을 잘 꾸지 않는 걸 보면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 것 같다. 4년 전의 나와 비교해보면 지금의 나는 정말 많이 발전한 것 같다. 과연 나의 오늘 하루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지, 그리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하루를 보냈는지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