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술에 취한 그와 만났다. 그가 막 내렸다는 버스정류장 쪽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가로등 아래 거뭇거뭇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느려도 너무 느리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건가. 나 역시 걸어가는 속도를 늦췄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가만히 서있다가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아주 살짝 발걸음을 옮기던 그가 어느 지점에선가 멈췄다. 그곳엔 논두렁이 있었다.
"뭐하세요?"
답이 없다.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건가. 어두워서 안 보이는 건가. 이대로 앞으로 가도 되나. 어떡하지. 미동도 없이 서있는 그의 모습이 낯설다. 조금씩 가까이 갔다. 그는 끊임없이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 들려..."
뭐가 안 들리냐 되물었다. 또 한참 대답이 없다.
"...개구리 소리. 분명히 며칠 전까지 여기서 개구리 소리가 들렸는데. 오늘은 조용해."
노상방뇨를 의심했던 마음이 싹 걷히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개구리 소리를 찾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개구리 소리가 들렸더랬다. 논이었던 이곳에 곧 건물이 들어설 거라 했다. 며칠 전부터 덤프트럭이 여러 번 오간 뒤론 논 한편에 흙더미가 생겼다. 개구리울음소리는 사라졌다. 그에겐 그게 그리도 우울할 일이던가. 나도 멈춰 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봤다. 아주 희미하게 자글자글한 울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조그맣게 들리는데요?"
"그러네."
한참을 귀 기울이고 서있던 그가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개구리 소리가 그립나?"
"좋잖아, 개구리 소리."
세상에 이처럼 소박한 주사가 또 있을까. 사라진 개구리 소리. 그 귀여운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 그와 보내는 시간은 늘 소박했다. 그는 요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롭고 흥미로운 걸 보면 방정맞게 뛰어다니는 나완 달리 조심스럽게 발걸음과 시선을 옮기는 사람이었다. 아주 꼼꼼한 그의 시선은 늘 작고 소중한 것들을 찾아내곤 했다. 울창한 숲 속을 같이 걸을 때면 신이 나서 찰칵찰칵 소리 내며 사진을 찍는 나완 달리 나뭇가지에 숨은 청설모를 발견하는 그였다. 어김없이 조용히 다가와 가만히 속삭이는 사람이었다. "저기 좀 봐봐. 청설모가 있어."
어느 날은 밥 먹는 자리에서 꼭 빌려주고 싶은 책이 있다고 했다. 내용이 정말 좋아서 네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 힘주어 말하는 그는 몇 번이고 감탄을 반복했다. 얼마나 좋은 책인지 궁금해졌다. 지금 빌려줘, 부탁하니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먼저 빌려주겠다 해놓고 머뭇거리네. 왜냐고 묻지는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며칠 뒤 그가 내게 왔다. 책을 내민다. 정도상 작가의 <꽃잎처럼>이란 책이었다. 오랫동안 소중히 품어온 꽃잎을 내보이듯 조심스럽게 책을 건네 온다. 그의 몸짓은 너무나 고요해서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고귀함이 있었다. 기대에 찬 얼굴로 첫 장을 열어보니 작가의 사인을 받아놨다. 우와, 하는 얼굴로 올려다보니 그는 웃고 있다. 작가 사인받아 주려고 며칠을 기다리게 했던 거구나. 나를 기다리게 했던 그 며칠이, 사인을 받고 내게 줄 생각에 흐뭇했을 그의 얼굴이, 이렇다 저렇다 이유 한 마디 없던 그의 침묵이, 그제야 와 닿았다. 나도 저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고 싶다. 작고 작은, 정말 별 거 아니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가치를 지켜내는 사람이고 싶다. 그날 밤, 몇 번이고 되뇌었었다.
그 남자는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어렸을 적, 그러니까 내가 기억이 나지 않던 오랜 시절부터 나를 키워온 사람. 일이 바빠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해도 한 번 만나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걸 품듯 나를 꼭 안아주던 사람. 아버지다.
아버지 같은 남자와 데이트하고 싶다. 연애도 결혼도 현실이라지만, 데이트만큼은 내가 꿈꾸고 싶은 만큼 꿈꿀 수 있는 거니까. 나이가 들어도 한결같은 아버지처럼 오랫동안 작고 소중한 것들에 웃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