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by 알로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화장실을 택한 열아홉의 나. 호기심과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던 일본의 시민들.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꺼려하는 심리와 꺼려하게 만드는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얇은 막을 나는 '눈치'라고 가정해보았다.


2013년 12월, 도쿄의 작은 원룸에서 지내던 때였다. 차디찬 마룻바닥 위 유일한 위안은 고타츠(일본식 온열 테이블) 였다. 테이블 주변에 도톰한 이불을 둘러놓고 뱀이 똬리 틀듯 그 안에 웅크린 채 겨울을 보냈다. 까먹은 귤껍질이 수북하게 쌓여가던 어느 밤, 때마침 티브이에선 삼성 갤럭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당신의 눈동자를 인식해서 디스플레이가 반응합니다. 아무것도 조작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선이 머무는 동안, 화면은 꺼지지 않습니다.'


삼성은 왜 저런 광고 문구를 내세웠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 시선을 읽어주는 기계에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말하지 않아도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기능을 왜 원할까. 나름 획기적이었던 그 광고 카피에서 내가 떠올렸던 건 90년대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었던 CM송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전 국민이 흥얼거렸다던 일명 초코파이송. 우리 역시 일본만큼이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에 열광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Tomasello, 2003). 아직 걷디 못하는 아기도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으면 엄마가 나를 봐줄 거란 걸 안다. 만약 아기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엄마가 방긋 웃으며 젖병을 물려준다면? 손을 휘저으면 맛있는 걸 먹는다는 패턴이 아기 머릿속에 각인되는 식이다. 여기까지는 전인류의 공통점. 아기가 어떤 문화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말을 해야 하는지' '알아서 눈치채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물론 그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건 바로 언어다.


언어에 두 가지 기능이 있다면 하나는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이요, 또 하나는 상대방과 나의 관계성을 대변하는 기능이다. 우리는 후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일본도 마찬가지. 반면 서양 문화권은 전자의 기능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군대에서 유래한 압존법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회 초년생에겐 꽤나 혼란스러운 화법이기도 한데, 예컨대 사장이 나한테 "김 부장 어디 갔어?"라고 묻는다면?


A 김 부장님, 미팅 가셨는데, 1시간 후에 돌아오십니다.

B 김 부장, 미팅 중이라 1시간 후에 돌아옵니다.


내가 다닌 회사에선 B가 유일무이한 정답. 더러 A를 택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사로운 예의를 개의치 않는 상사라면 그런다 보다, 넘어가지만 깐깐한 상사라면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압존법대로면 B가 맞다. 사장이나 부장이나 나에겐 상사이지만, 부장은 사장의 부하직원이니 사장 앞에선 부장을 낮춰주는 식이다. 신기한 건 외부 거래처에서 김 부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온 상황이다. 김 부장은 나의 상사이고, 외부인은 나와의 관계가 없는 만큼 A를 택할 확률이 높다.


일본은 조금 다르다.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로 김 부장을 찾는다면


A 지금 김 부장 자리를 비웠는데, 메모 남겨드릴까요?

B 지금 김 부장님 자리를 비우셨는데, 메모 남겨드릴까요?


무조건 A다. 야마모토가 거래처 말단사원이든 과장이든 사장이든 상관없다. 나한테 김 부장은 상사지만, 동시에 같은 집단에 속한 관계다. 반면 야마모토는 표면적이지만 외부인이니까 높여주는 식이다. 여기에 미우치(身内) 문화가 들어간다. 몸 안이나 마찬가지라는 이 단어는 내가 속한 집단을 의미한다. '나 = 김 부장 < 야마모토'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서양 문화권에선 미스터 킴이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 김 부장이든 부장님이든 아이 돈 케어. 정보전달에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처럼 문장 곳곳에 관계성을 대변해주는 단어가 꼭꼭 숨어있는 이 화법이 그들에겐 신기해 보일 수밖에 없다. 사장한테 '밥 먹었냐? 맛있디?' 할 수 없는 이유다. 재밌는 건 이런 문화권일수록 커뮤니케이션이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야, 이번 시합 잘하면 망하겠는데?"


'잘하면' 이 진짜 '잘하면'을 뜻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안다. 그만큼 언어가 지닌 의미보다 숨겨진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나라와 눈동자까지 읽어주길 바라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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