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느냐 찌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이런저런 일들로 글쓰기 소재들이 막 쌓일 때, 그것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당장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아 핸드폰에 짧게 기록해 두지만, 그건 이야기의 단초일 뿐 전개와 해결은 오롯이 나의 기억에 달려 있다. 사람의 기억력은-특히 나의 기억력은- 믿을 바가 못된다. '와, 이걸 글로 써봐야겠다' 했던 신명과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글감을 메모해 둔 후에는 최대한 빨리 옮기려 노력하고 있다.
요즘이 바로 그런 시기이다. 일개 회사원이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하다가 앞뒤 주말을 포함하여 9일의 하계휴가를 다녀왔으니, 얼마나 새로운 경험과 생각이 많아졌겠는가. 이때를 놓칠세라 무진장 쓰고 있다. 글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그냥 자판을 두드릴 뿐이다. 이번 휴가 때 뵌, 수필 책을 3권이나 내신 장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일단은 써라.]
최근에 쓴 글의 초안을 들고 아내에게 갔다. "좀 봐줄 수 있어?" 아내는 소파에 누워 나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 모습이 사찰에 있는 와불 같다. 표정은 자비롭지 못했다. 맞춤법, 문법, 어색한 표현 등을 찾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의 유일한 교열자이자 감수자인 아내가 글을 검토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꽤 긴장된다. 그렇다고 훈육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맘 졸이고 서있으면 뭐 하나. 글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마침 아내 잠옷 상의가 살짝 올라간 틈을 타 뱃살이 세상 구경하려 나왔다. 그거 잘됐다. 긴장도 풀 겸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잠수를 하듯 안면을 배에 3초간 묻었다가, 볼을 맞댔다가, 콧잔등을 배꼽에 넣었다가, 손을 올려 뱃살의 탄력을 이용해 텀블링도 했다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시늉도 한다. 그 좁은 공간은 나에게 운동장이자 수영장이자 콩콩이, 피아노까지 된다. 그냥 다목적 문화체육 놀이공간이라 부르는 게 맞겠다. 뭐가 이렇게 재밌지? 이 알 수 없는 친화력과 편안함은 뭐지? 뱃살의 촉감 때문인가? 밀도? 경도? 글을 검사받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아내의 배를 무엇에 비유할꼬. 연두부가 떠올랐다. 아니, 그것보다는 더 탄력 있다. 도토리묵? 그것보다는 무르다. 음식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럼 개구리? 어렸을 때 설날에 삼촌들이 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가면 양파망에 한 무더기 잡아오는데, 그걸 빨간 대야에 담아 소금을 쳤다. 그럼 얼마못가 배를 하늘로 향하고 죽고 마는데, 그때의 맨질맨질했던 개구리 배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내의 것은 좀 더 살집이 있다.
어릴 적 기억이 더 떠올랐다. 한겨울 밖에서 기르던 개가 분만할 때쯤 되면, 부모님은 주택 내부에 통창으로 된 테라스로 데려와 특별히 돌보곤 하셨는데, 보통 대여섯 마리쯤 낳았다. 새끼들은 눈도 못 뗀 채 어미 젖꼭지를 찾아 젖을 빨고, 배 부르면 자고 그리고 일어나면 다시 젖을 빨고, 그러기를 며칠간 반복한다. 사나흘만에 강아지의 배는 아주 통실통실해지는데, 그때의 배가 지금 아내의 배와 매우 흡사하다.
이전에는 왜 이런 재미를 몰랐을까. 생각해보니 몇 개월전만 하더라도 매우 날씬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 아내는 많이 말랐었다. 지금도 다른 사람이 보면, "아유, 저것도 뱃살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저건 그냥 가죽이야 가죽!"이라며 나한테 볼멘소리를 할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거에 워낙 말랐었기에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성장과 발전(?)을 이룬 것만은 맞다. 그 변천사를 모두 다 알고 있다. 남편이니까.
사실 난 아내 뱃살이 늘거나 줄거나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유희를 즐길 수 있으니 늘어나는 편이 더 낫겠다. 다만 아내 건강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갑자기 어디가 나빠진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급속하게 찔 수 있을까, 볼 때마다 걱정이다. 평생 마른 체형으로만 살아온 나는 이 현상이 일반적인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아내 정도의 뱃살을 가진 이에게 가서 '이게 정상인가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난감하다.
아, 빼느냐 찌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빼라고 하니 나의 휴게, 오락공간이 사라지고, 찌라고 하니 아내의 건강이 문제로구나. 다음 달에 예정된 아내의 건강검진을 보고 나의 의견을 전달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