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경 Oct 04. 2022

찬바람 녹이는 새콤달콤한 맛

귤처럼 친근한 과일이 또 있을까?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고, 가격도 저렴해 왕창 사놓고 따뜻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며 겨울 내내 손이 샛노랗게 물들 때까지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텁텁한 입안을 새콤달콤하게 채우는 맛도 두말하면 입 아픈 매력 포인트! 요즘은 품종이 다양해져서 입맛대로 골라 먹는 재

미까지 쏠쏠하다. 귤이라는 이름이 한글이 아닌 한자 橘(귤 또는 귤나무 귤)인 점도 흥미롭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귤이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원망의 대상이었다. 열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귤나무의 특성상 과거에는 제주도에서만 재배됐고 귤은 특산물로 지정되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만 먹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귀한 귤은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선정됐다. 귤로 인한 농민들의 고생은 이때부터였다. 귤이 열리면 관원들이 와서 개수를 세는데 비와 바람을 비롯한 자연재해로 귤이 떨어지거나 상해서 수가 줄면 절도죄를 물어 벌을 받았다. 이를 면하려면 닭, 돼지 등을 바치거나 상당히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 집안 살림이 거덜 나기까지 했다고. 귤나무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하니 어느 누가 심고 싶어 할까? 결국 농민들은 제 손으로 귤나무를 죽이고 뿌리를 뽑아 흔적조차 없앴다. ‘관리들의 극심한 횡포에 고생이 많았구나!’라며 농민들의 아픔에 공감되는 동시에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죽임을 당한 귤나무가 불쌍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귤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귤이 다시 재배됐다는 뜻이 아닌가. 오랜 세월이 지나 귤나무의 지위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제주도 내 귤나무 재배지가 늘었고 귤 농사는 대대적인 성황을 이뤘다. 당시 집에 귤나무 두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는 별명도 얻었다. 집안을 말아먹는 주범에서 일으키는 주역으로 제대로 환골탈태했다.


우리가 먹는 귤의 대부분은 온주밀감이다. 제주도 최초의 온주밀감 나무는 1911년 제주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출신 에밀 타케 신부님을 통해 소개됐다. 이 신부님이 왕벚나무 몇 그루를 일본에서 선교 활동하는 신부님에게 보냈고, 그 답례로 온주밀감 나무를 받아서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 받은 14그루의 온주밀감 나무가 제주도에서 널리 재배된 덕분에 오늘날 감귤 주산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중 한 그루가 최근까지 생존을 이어가다 2019년에 고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흔적까지 없어진 건 아니다. 제주도 최초의 감귤나무와 에밀 타케 신부님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제주도 서귀포시 서흥동 주민들이 나무를 특수 약품 처리해 <홍로의 맥>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나는 이 작품을 제주도 ‘면형의집’에서 만났다. 생명을 다한 나뭇가지가 지지대에 고정돼 매달려 있는 상태였지만 제주도민의 생활에 이바지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든든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또한 제주도의 경제를 지탱하며 살기 좋게 만들어준 귤나무를 곁에 두고 은혜에 보답하는 주민들의 마음에 가슴 한쪽이 훈훈해졌다.


제주도를 다니다 보면 감귤 판매 현수막을 쉴 새 없이 마주한다. 감귤뿐만 아니라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등 그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참고로 한라봉은 청견과 온주밀감을, 천혜향은 밀감류와 오렌지류를, 황금향은 한라봉과 천혜향을, 레드향은 온주밀감과 한라봉을 교배한 것. 온주밀감은 수확 시기에 따라 극조생, 조생, 중생, 만생으로 구분된다. 매번 이름이 헷갈리는 탓에 가게 사장님에게 맛을 설명해서 레드향을 추천받았다. 그때마다 ‘이번엔 이름을 꼭 기억해야지!’라고 굳게 다짐하지만 언제나 머릿속에 남는 건 ‘맛있게 먹었던 기억’뿐. 언제쯤 그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싶다.


앞서 설명한 개량된 품종은 맛과 생김새에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은 있다. 바로 산도는 낮고 단맛이 강하다는 점. 온주밀감 중 타이벡 소재의 흰 천을 나무 밑에 깔아놓아 귤에 골고루 빛을 쪼여 당도를 높인 타이벡도 마찬가지다. 단맛이 강한 뀰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입맛대로 재배 방식도, 품종도 그에 맞춰진 셈이다. 아, 뀰은 어느 상인이 귤이 꿀처럼 달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두 글자를 합쳐 뀰이라고 쓴 데서 비롯된 말.


최근에는 플랜테리어 인기에 힘입어 귤나무를 실내에서 화분에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초록 잎의 싱그러운 기운과 상큼한 과즙이 느껴지는 귤의 색감이 매력적이다. 특히 귤나무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멋져 SNS 좀 한다는 사람들의 피드에 꼭 한 번은 등장한다. 과거에는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로 인해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곁에 두고 가장 아끼는 과일인 귤. 올겨울에는 귤과 함께 또 어떠한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지 기대된다.




귤(온주밀감) | 운향과 귤속 / Citrus unshiu (Yu.Tanaka ex Swingle) Marcow.

제주도에서 많이 재배되고 열매가 새콤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