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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Oct 04. 2022

핑크뮬리

이면을 살피는 자세

분홍색은 뭔가 낯간지러워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핑크뮬리만큼은 마음에 든다. 사진 속 핑크뮬리는 파스텔을 손에 묻혀 종이 위에 스윽스윽 문질러 놓은 것 같은 보드라운 분홍빛이 매력적이다.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 손으로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다. 사진으로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더 근사할까? 집 근처 카페에서 핑크뮬리를 보긴 했지만, 들판에 무리를 지어 자라는 핑크뮬리를 보러 나설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취재를 계기로 운 좋게 핑크뮬리를 신나게 보게 됐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그때 그 분홍 물결이 선사한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 콘텐츠 제작을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한 지역의 유서 깊은 역사 유적지부터 통통 튀는 젊은 감성이 묻어나는 곳까지, 여행자의 관점에서 가볼 만한 곳은 거의 다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여기에 최근 식물의 인기에 힘입어 자연 풍경이 뛰어난 곳도 포함시켰다. 예를 들면 특정 식물의 군락지나 식물원 등이다. 그중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전주와 경주다.


전주라면 한옥마을밖에 몰랐는데 취재를 통해 수목원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이곳은 1970년대에 전주묘포장으로 시작해 2019년 1월, 이름을 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으로 바꿔 재탄생했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훼손된 자연을 복구하고 다양한 식물종을 보존 및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된다. 내가 방문한 때는 가을이었다. 수목원 입구에 들어서니 지나가는 사람들 열에 아홉이 핑크뮬리 이야기를 하며 찾아 나섰다. 자연스레 기대감이 커졌다. 정해진 촬영 순서에 따라 식물원의 모습을 담아야 하는 탓에 핑크뮬리부터 보러 갈 수 없는 상황이 나를 애타게 만들었다. 내가 키우는 박쥐란이 있어 반가웠던 양치식물원, 무궁무진한 무궁화가 식재된 무궁화원, 물 위에 뜬 채로 살아가는 식물들이 흥미로웠던 수생식물원 등을 취재하고 한 폭의 그림 같은 대나무 숲에서 청량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핑크뮬리를 보려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드디어 핑크뮬리 차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인데 웬걸? 그 이상이었다. 분홍색 구름이 하늘을 떠다니다 잠시 쉬러 땅에 살포시 내려앉은 듯한 풍경이었다. 볏과 식물이라서 여느 꽃처럼 얼굴이 크지도 않은 데다 그 형태마저 희미한데 여럿이 모여 있으니 아름다움이 발휘되는 듯했다. 바람 따라 일렁이는 분홍색 물결 역시 장관이었다. 일하면서 만나는 대상에 사심을 느낀 적이 많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우와!’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경주에서 본 핑크뮬리는 조금 색달랐다. 전주에서 핑크뮬리를 실컷 본 후라서 감흥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첨성대를 배경으로 한 핑크뮬리는 이전까지 알고 있던 경주의 이미지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내게 경주는 ‘역사가 숨 쉬는 천년고도의 도시’라는, 다소 예스럽고 근엄한 곳이자 초등학생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추억의 수학여행지였다. 이렇게 무게감 있던 도시가 분홍색 식물을 만나니 상큼하고 한층 어려진 느낌이었다. 첨성대가 보이는 핑크뮬리 밭에서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들에게선 활기가 넘치고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몇 해 전부터 가을이면 ‘핑크뮬리 인생 사진 스폿’이라는 제목의 콘텐츠가 SNS에서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매번 새로운 장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건망증이 심해서 이미 알고 있던 곳을 까먹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2019년 기준, 전국 지자체 공공기관 주도로 조성한 핑크뮬리 밭의 면적은 최소 1만 제곱미터로 이는 축구장 15개가량을 합한 크기다. 이렇게 많은 핑크뮬리 밭이 생긴 이유는 내가 핑크뮬리를 보며 느낀 점의 연장선에 있다.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서다. 핑크뮬리를 통해 익숙했던 관광지에 색다른 개성을 더해 사람들을 재방문하게 만드는 전략도 있겠다. 게다가 실제로 관광객이 늘었다는 성공 사례가 많으니 여러 지자체에서 핑크뮬리를 심는 것 같다.


우후죽순 늘어나는 핑크뮬리 밭, 문제는 없을까? 핑크뮬리는 미국, 유럽 등지에서 건너온 외래종으로 번식력이 막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핑크뮬리 근처에는 잡초가 자라지 못할 정도인데,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한국 토종 식물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핑크뮬리 종자는 바람을 타고 쉽게 확산된다. 핑크뮬리 밭 바깥까지 종자가 퍼지면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식물들의 생존을 방해할 수 있다. 기존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핑크뮬리를 뿌리째 없애야 하는데 그러려면 독성이 강한 제초제를 사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늘어나는 핑크뮬리 밭이 한국 토종 식물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환경부는 핑크뮬리를 생물 다양성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검토했고 위해성 2급으로 분류했다. 생태계를 교란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은 1급은 아니지만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각 지자체에 핑크뮬리 식재를 자제하라고 권고했다. 최근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이미 조성된 핑크뮬리 밭을 엎고 그 자리에 토종 식물을 심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더불어 핑크뮬리 확산을 막기 위한 수칙, 가령 ‘사진은 밭 한가운데가 아닌 밖에서 촬영하기’, ‘핑크뮬리 꺾어가지 말기’ 등을 알리는 사례도 있다.


인간이 이익을 위해 외래종을 들였는데 반대로 스스로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된 격이다. 나 역시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멀어 그 이면까지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다. 외양만 강조했다. 아직 멋진 모습이 발견되지 않은 토종 식물이 충분히 많이 있을 텐데. 앞으로 핑크뮬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겠다. 더 나아가 평소에도 어떠한 상황이나 사물의 이면을 깊이 헤아려야지.




핑크뮬리 | 벼과 쥐꼬리새속 / Muhlenbergia capillaris (Lam.) Trin.

미국 서부나 중부의 평야에서 무리 지어 자생하며 가을이면 분홍색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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