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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Oct 04. 2022

선인장

우리, 생각보다 인연이 깊었어

깊게 고민하지 않고 ‘저건 원래부터 그랬으니까’라며 그러려니 넘어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교한 외모와 거리가 먼 뭉툭한 줄기, 그와 대비되는 삐죽삐죽한 가시가 공존하는 선인장이 내게는 그러한 대상이었다. 상반되는 성질이 한 데 모여 있는 독특한 외모를 보고도 ‘덥고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당연한 결과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까. 하지만 서울식물원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형태의 여러 선인장을 마주하니 호기심이 동했다. 면밀히 관찰한 다음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봤다. 그러려니 하며 넘어간 탓에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쏟아졌다.


선인장은 신대륙이 발견된 15세기 대중에 소개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직 화석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하지 않다. 연구자에 따라 1만 5천 년 전 또는 브라질, 멕시코에서 발견된 선인장의 흔적을 바탕으로 1만 2천~1만 9천 년 전으로도 추정한다. 선인장의 영어 이름 ‘Cactus’는 ‘가시’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인 ‘Kaktos’에서 유래되었다. 대부분의 선인장은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 적응하기 위해 줄기와 뿌리에 수분을 저장하며 수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줄기의 외피는 두껍고 광택이 나는 구조로 진화했다. 같은 이유로 잎은 가시로 변형됐다. 또한 낮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광합성하는 다른 식물과 반대되는 사이클도 갖게 됐다.


어라? 이건 다육식물과 비슷해 보인다. 선인장이 곧 다육식물인 걸까? 아니다. 우선 범주가 다르다. 다육식물이 상위 개념이다. 그 아래에 선인장이 위치한다. 다육식물 중 일부만 선인장에 포함된다. 선인장이 다른 다육식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가시자리(Areole). 둥글고 작은 꼭짓점같이 생긴 눈으로 크기는 1~13밀리

미터다. 이 부분에서 큰 가시, 방사상 가시, 털 가시 또는 강모가 자라고 새순, 꽃이 핀다. 이 가시자리에서 자라는 가시는 선인장 몸체에서 비교적 쉽게 분리된다. 이와 달리 다육식물의 경우, 가시자리가 없으며 선인장과 비슷한 가시가 나긴 하지만 조직에서 바로 자라기 때문에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선인장의 가시자리가 1밀리미터밖에 안 된다면 이 둘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선인장이라고 하면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모습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기후인 열대우림에서도 자생한다고 한다. 이처럼 덥고 습한 곳의 선인장은 볕이 강하지 않은 곳에 자라는 나무나 바위 표면에 몸을 부착해 살아간다.


한국에도 선인장 자생지가 있다. 바로 제주도 월령리 금능 해수욕장 근처다. 인터넷에 ‘월령선인장 군락지’라고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참고로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따르면 월령선인장의 추천명은 왕선인장이다. 왕선인장 군락지인 이 일대는 천연기념물 제429호로 지정돼 있다. 여기서 자라는 왕선인장은 열대지방이 원산지이며 손바닥선인장으로 알려져 있고 제주도에서는 백년초라고도 부른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따르면 손바닥선인장, 백년초는 비추천명이다)


이 선인장은 해류를 타고 바위 틈에 안착해 번식하면서 오늘날 국내 유일의 선인장 군락지를 형성했다고 추정된다. 군락지를 따라 데크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15~20분 정도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 참고로 이 길은 올레길 14코스에도 포함되어 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 틈에 자라는 선인장들을 감상할 수 있다니! 오랫동안 머릿속에 있던 선인장 자생지와 다른 풍경이 볼수록 신기하다. 내가 갔을 땐, 입고 있던 우비가 풀어헤쳐질 정도로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예상했던 이색적인 매력을 만끽하지 못했지만, 이 날씨 또한 내가 알고 있던 선인장 자생지와 상반돼 재미있었다. 길쭉길쭉하고 풍성한 잎을 뽐내는 야자수만 제주도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왕선인장 군락지도 추가해야겠다.


왕선인장은 여름에 노란색 꽃이 피고 11월쯤에는 보라색 열매가 열린다. 맞다, 제주도 특산물 중 영롱한 자줏빛을 띠는 그 열매! 여행 기념품 초콜릿 속에서 자주색 크림으로 어렴풋이 그 흔적을 느꼈는데 때를 잘 맞추면 생과의 상태로 만날 수 있겠다. 다음 제주도 여행 때는 바로 여기, 왕선인장 군락지부터 들러야겠다. 왕선인장 열매를 보니 동남아에서 자주 먹던 과일의 정체도 궁금해졌다. 자주색 껍질에 연두색 꼬투리같이 생긴 부분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고 하얀 과육에 검은 씨가 콕콕 박힌 것. 이 과일은 용과, 영어로 피타야(Pitaya)로 부르는데 역시 선인장의 열매다.


선인장과 한국의 인연은 또 있다. 잠시 18세기 멕시코로 향하자. 당시 멕시코는 다양한 인종과 문명이 어우러져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인도 꽤 있었다. 선박용 밧줄의 원료가 되는 선인장인 에네켄(발음이 낯설어 ‘애니깽’으로 불렀다) 재배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민한 사람들이다. 농장 측에서는 ‘숙소 제공’, ‘높은 임금’, ‘아홉 시간 근무’ 등을 노동 계약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 지켜진 건 없었다. 농장 일은 말도 못 하게 고됐다. 설상가상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농장주가 폭력을 행사하는 횡포도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꾹 참으며 선인장 농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착실히 일했고 멕시코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로 고통받는 조국을 위해 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에도 큰 힘을 보탰다. 지금 당장 내 몸이 힘든데 멀리 있는 우리 민족의 고통까지 헤아리다니! 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나의 아픔보다 민족의 희망을 위해 애쓴 선조들의 모습에 숙연해진다. 한국 토종 식물이 아닌 선인장에, 게다가 머나먼 남미의 선인장에 한국인의 애환과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서려 있을 줄이야.


선인장이 워낙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탓에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찰 것 같지만 다른 동물에게는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고장 난 로봇처럼 줄기가 각각 위, 아래로 각지게 꺾인 변경주선인장의 내부는 낮엔 바깥보다 시원하고 밤엔 따뜻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딱따구리는 선인장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산다.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주인 없는 구멍은 다른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선인장이 자연스럽게 사막의 공유 주택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한 선인장의 꽃은 해가 진 뒤에 피는데 밤에는 박쥐가, 이른 오전에는 개미와 벌, 새가 꿀을 먹으러 모여든다. 뾰족한 가시 탓에 쉽게 곁을 내주지 않을 줄 알았던 선인장에 이런 푸근한 정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선인장은 긍정적인 기운을 전해주는 식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인장에 물을 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브라질 사람들은 지붕에 던진 멜로칵투스속 선인장이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리고 1739년쯤 멕시코 어느 지역의 가톨릭 성당에는 석재 벽에 싹을 틔운 선인장에 성모마리아가 서 있는 듯한 형상이 나타났다. 상서로운 현상 덕분에 성당은 이 선인장을 보기 위해 모여든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선인장에 대해 알고 나니 우리 집 TV 진열장 위, 조막만 한 화분에서 자라는 앙증맞은 백도선선인장이 달리 보인다. 사막을 터전으로 삼는 동물들을 지켜주는 푸근한 보금자리이자, 선조들의 애환과 독립을 향한 투지, 행운을 기원하게 만드는 신성한 존재로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저 귀여워 보이기만 한 작은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마저 느껴진다. 앞으로 선인장을 볼 때마다 많은 사연이 떠오를 것 같다.




왕선인장 | 선인장과 선인장속 / Opuntia monacantha (Willd.) Haw.

손바닥선인장, 백년초로도 불리며 제주도에 군락지가 있고 자주색 열매는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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