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로즈마리
향은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에 호감 여부가 결정되는 직관적인 성격을 지닌다. 인간의 다섯 감각 중 후각이 가장 예민하니 그럴 수밖에. 내 경우에도 다른 감각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데 유난히 후각에는 애착이 많이 간다.
향에 대한 애정은 중학생 때부터였다. 체육복을 빨고 나면 거기에 향수를 뿌렸다. 섬유유연제만으로는 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후로 체육복이 아닌 교복과 일상복에도 향수를 뿌리면서 향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좋아하는 향이 3~4년 주기로 바뀌었다. 샤넬 넘버5 같은 포근한 향부터 샹스같이 싱그럽고 달콤한 향까지 폭이 꽤 넓은 편. 그렇게 이 향, 저 향을 떠돌다가 7~8년 전에는 좋아하는 향의 범위가 좁아지면서 구체적으로 바뀌었고 특정 분위기의 향에 정착했다. 계절과 상황에 따라 향을 고르는 습관도 생겼다.
정착한 향의 특징은 꽃과 과일, 나무향이 어우러져 상큼하면서도 쌉싸름하다. 주로 딥티크 베티베리오나 탐다오, 롬브르단로를 주로 뿌린다. 청량감이 필요한 여름엔 자몽 등 시트러스 계열이 함유된 베티베리오를, 그 밖의 계절에는 우디 계열의 탐다오를 뿌리고 달콤한 향이 내킬 때는 장미향을 머금은 롬브르단로를 고른다.
외출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향을 늘 곁에 둔다. 다만 이때는 향수처럼 향이 강한 것보다는 은은하게 공기 중에 맴도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향수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상큼하면서도 쌉싸름하고 살짝 무게감이 느껴지는 라벤더와 로즈마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 둘도 상황에 맞게 고른다.
라벤더라는 이름은 ‘씻다’를 뜻하는 라틴어 ‘Lava’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로마인들은 라벤더로 몸과 머리카락을 씻어서 그 향이 배도록 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개발되기 전, 지독한 냄새로 고생하던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벌레를 쫓기 위해 베개에 라벤더를 넣었으며, 라벤더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빨래를 널어 향을 입혔다. 참고로 라벤더 중에서도 스패니시라벤더의 향이 가장 강하다고 전해진다. 라벤더 향은 두통을 완화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향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데 기분까지 좋게 해주다니! 역사 속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오늘날 나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라벤더에 푹 빠진 이유가 납득이 간다. 특히 편두통이 심해 약을 자주 먹는 탓에 이러한 자연의 힘은 소중하다. 라벤더는 생화일 때는 물론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린 상태에서도 향이 유지된다. 나 역시 그 향을 느꼈다.
얼마 전, 잉글리시라벤더를 넉넉하게 써서 만든 리스를 서재 문에 걸어뒀다. 그랬더니 서재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일하러 서재에 들어서면 종종 신경이 곤두섰는데, 문을 열면서 라벤더 향을 맡으니 그 기분이 한결 누그러지는 듯했다. 공기청정기의 바람을 타고 온 라벤더 향이 코끝에 닿으면 그 짧은 순간에 심호흡을 하는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라벤더 효과를 본 이후, 라벤더의 영역은 서재를 넘어 거실, 침실까지 확장됐다.
침대 머리맡에는 라벤더 향이 나는 석고 방향제를, 거실에는 라벤더 오일을 함유한 디퓨저를 두었다. 특히 바빠서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거나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러한 날이 며칠 이어지면 자기 전에 라벤더 차를 마신다. 너무 뜨거우면 오히려 잠이 깰 수 있으니 얼음 두어 개를 띄워 온도를 적절히 맞춘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차를 마시며 깊게 심호흡하면 머리끝부터 손, 발끝까지 이완된다. 그 상태로 침대에 누우면 확실히 덜 뒤척이고 중간에 깨지 않고 깊게 잔다. 라벤더 덕분에 하루를 편안하게 마무리하고 잠도 잘 자게 되어서 티타임을 갖는 습관이 생겼다.
긴장을 푼 상태가 좋을 때도 있지만 신경을 곧추세워야 할 때도 있는 법. 하지만 원고 마감이 코앞인데 워드에 한 글자도 쓰지 않은 채 인터넷 창을 띄워놓고 딴짓을 하거나 마감 끝나고 놀 생각에 정신이 팔렸을 때처럼 정신력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집중력을 올려야 하는 상황에선 상쾌하고 자극적인 로즈마리 향이 나를 구원해 준다. 로즈마리라는 이름은 ‘로즈’라는 단어 탓에 장미와 관련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로즈마리는 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고 바닷가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사람들은 이점에 착안해 각각 이슬과 바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로즈(Ros)’와 ‘마리(Marinus)’를 조합해 ‘바다의 이슬’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줬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에서 햄릿이 사랑한 오필리어가 사랑을 기억해 달라는 대사를 하면서 로즈마리가 추억과 기억을 상징하게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최근 로즈마리가 기억력과 연관이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밝혀졌다. 영국의 한 대학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다음, 한 그룹은 로즈마리 향을 맡게 하고 다른 그룹은 향을 맡지 않게 한 상태에서 기억력을 시험했다.
그 결과, 향을 맡은 그룹의 성적이 더 좋았는데 이들 혈액에서 기억력에 관여하는 체내 물질인 시네올 수치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는 특히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기억하는 것과 관련된 부분으로 연구팀은 로즈마리 향을 활용한 질병 치료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로즈마리의 힘으로 마감을 무사히 했다는 믿음이 과학적으로 일리가 있었구나!
로즈마리 향을 즐기는 방법은 이렇다. 나무토막 디퓨저에 로즈마리 에센셜 오일 2~3방울을 떨어뜨려 바로 코로 가져가 머릿속까지 깊숙하게 향을 채운 다음, 노트북 옆에 둔다. 이렇게 하면 타자칠 때 손이 움직이면서 생기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진다. 요즘에는 스머지 스틱으로도 로즈마리 향을 즐기고 있다. 스머지 스틱은 세척한 로즈마리 다발을 말린 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면사로 꽁꽁 묶은 것. 스틱에 불을 붙여 불꽃이 일면 몇 초 후 불을 끈 뒤, 불에 타지 않는 그릇에 두고 솔솔 피어나는 향을 맡는다. 에센셜 오일이 세련된 향이라면 이 스머지 스틱은 자연에 가까운 투박한 향인데 그 점이 매력적이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액운, 잡념을 쫓아내거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의식에 활용된다. 바르셀로나에서 비치 요가 클래스를 들었을 때, 시작 전 선생님께서 이 스머지 스틱을 들고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기도하며 향을 퍼뜨린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였겠다.
서재 책상 바로 왼쪽에는 다양한 향 제품을 담은 상자가 있다. 다른 성분과 섞인 향도 있고 단일 성분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오일부터 샤쉐, 스틱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매장에서 받은 시향지도 있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맡는 향도 있고 의식을 치르듯 연기와 분위기까지 느끼는 향도 있다. 어렸을 때 기분 전환용으로 뿌리기 시작한 향수가 지금은 일상에서 한 부분을 차지했다.
최근에는 여행지의 이름난 브랜드의 향을 사서 모으는 재미에 빠졌다. 여행지를 기억하는 나만의 방식이자 향을 통해 여행지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향을 맡으며 기분 전환도 하며 잠시 쉰다. 팬데믹 상황이 나아져서 앞으로 향과 함께 기억하고 싶은 여행지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라벤더 | 꿀풀과 라벤더속 / Lavandula angustifolia Mill.
보라색 꽃이 피고 꽃, 잎, 줄기를 덮은 털 사이에 있는 기름샘에서 특유의 향이 난다.
로즈마리 | 꿀풀과 로즈마리속 / Rosmarinus officinalis L.
길쭉한 잎이 특징으로 상큼하면서도 강렬한 향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