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게 위로를 받고 떠오른 한 사람, 엄마
집에 식물이 늘어나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엄마다. 기억으로는 대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수업이 없는 날이었지만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떠져서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엄마가 한창 출근 준비 중이었다. 옷을 다 챙겨 입고 가방도 갖고 나와서 배웅하려는데 엄마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더니 방석을 가져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일이지?’
엄마가 앉은 곳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실내 조경이 있었다. 엄마가 가꾸는 것으로 작은 폭포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그 힘으로 물레방아가 쉼 없이 돌아갔다. 물레방아에서 떨어진 물이 모이면서 작은 연못을 이루고 그 주위로 군데군데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조경 옆에는 크고 작은 화분을 놓아서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숲 같았다. 엄마는 분무기로 식물에 물을 뿌리고 작은 가위로 이곳저곳을 다듬어주었다. 한참을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해하지 못했다. 잠과 밥을 포기하고 식물 돌보는 쪽을 택한 엄마의 생각과 식물을 보니까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회사에 다닐 때는 ‘내가 언제까지 이 회사에 다닐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면 프리랜서인 지금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운 좋게 작업 의뢰가 꾸준히 들어오고 어떤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앞으로 6개월~1년까지는 상황이 좋지만 5~7년 뒤에도 지금처럼 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살면서 반드시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지만 일이 끊임없이 밀려들 때는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큰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규모만큼 허탈감과 공허함도 크다. 일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도 있지만 어젯밤까지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계속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할 일이 없어지니 실업자가 된 기분이다. 그때 이 고민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근심의 무게도 더욱 가중된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 5년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낯설다. 아침에 밀려오는 이 감정을 잠재우려면 눈 뜨자마자 할 일이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을 봤다. 몽롱한 상태에서 소파에 앉아 눈꺼풀만 끔뻑 대니 다시 잠이 몰려온다. 청소기를 돌리고 집안일을 했다. 하지만 집안일이라는 게 끝이 없다. 나를 위한 개인 시간까지 할애하게 된다. 게다가 티도 안 나서 보람도 적다. 이 또한 적합하지 않다.
여러 생각에 잠기다 그동안 놓친 걸 깨달았다. 바빴던 지난 며칠 동안,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 앞에 붙잡혀 있느라 식물들에 소홀했던 것. 식물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준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제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란다는 식물이라도 무관심엔 장사 없을 거다. 게다가 관심을 듬뿍 줄 때와 생사 여부만 간신히 확인하는 바쁠 때의 편차가 너무 커서 식물 입장에서는 서운함도 클 것이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그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화분 앞에 쿠션을 놓고 앉았다. 극락조화 이름도 불러보고 얼마나 더 자랐는지, 잎이 난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는지, 화분을 돌려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며 유심히 봤다. 박쥐란은 못 본 사이에 영양엽이 훨씬 짙어졌다. 보통 이쯤 되면 새로운 영양엽이 나올 준비를 한다던데.
백도선 선인장이 집에 왔을 당시에는 눈사람처럼 2개의 동그란 자구가 맞물려 있고 아래쪽 자구 측면에 길쭉한 자구가 위쪽으로 나있었다. 그 모습이 한쪽 팔을 들고 발표하는 이모티콘을 닮아서 귀여웠는데 주변 환경에 잘 적응했는지 그 팔이 훌쩍 자랐다. 팔이 너무 길어져서 지금은 가제트, 오랑우탄 같다. ‘그 변화를 진작에 알아챘다면 사진으로 남겨놨을 텐데. 아니, 적어도 내 눈에는 담았을 텐데.’ 알아서 잘 자라는 식물들이라 분주하게 손볼 게 없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아침부터 굉장히 큰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그래서 엄마도 출근하기 전에 식물과 시간을 보냈던 걸까? 엄마를 피곤하게 만들었던 복잡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확실히 알게 된 건 식물을 가꾸고 들여다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엄마의 말이다.
라며 극락조화를 집에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했던 말도.
식물과 함께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신기하게 일에 대한 고민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졌다. 늘 한자리에서 자신의 성장에 집중하면서 주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포기할 것이 있으면 과감히 포기하는 식물의 모습에서 앞으로 어떻게 커리어를 개발해 나갈지에 대한 혜안도 얻었다. 활자로 기록되어 있거나 구체적인 사례를 본 것도 아닌데 식물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본보기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분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엄마의 모습이 어른댄다. 엄마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