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게 살아도 괜찮아
밥이 먹고 싶다던 형을 졸라서 들어간 피자 가게는 오려고 했던 곳이 아니었다. 그걸 가게 앞에 와서야 알았는데, 심지어 가려던 곳도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두어 번이나 가본 곳인데도, 위치는커녕 이름까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은 건 왜일까. "여기 아니야?"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형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는데, 나는 일단 올라가 보자고 대답했다. 다른 곳을 찾기에는 너무도 덥고 습한 날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토핑도 추가하지 않은 시카고피자와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베이컨과 불고기를 듬뿍 얹은 피자를 기대하고 왔는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너무나 클래식한 시카고피자였다.
우리는 각자의 접시에 피자를 옮겨 담은 뒤에 대화를 이어갔다. 형 하고는 대학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서로 할 얘기가 많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대한 불만부터 시작해서 대학 시절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안부와 그들과 관련된 창피한 기억들, 끝이 안 좋았던 동기의 이야기까지. 한참을 떠들고 나니 결국 되돌아오는 건 막막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네가 여길 오고, 내가 졸업했어야 하는 건데." 그 시절 형은 예대에 재입학을 준비하면서 내게도 몇 번이나 권했다. 형은 1년 휴학하면서 3학년이었고, 나는 4학년으로 졸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이제 와서 1학년으로 재입학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형도 아무런 낌새 없이 그런 권유를 한 건 아니었다. 사실 흔들렸다. 2학년 때도 예대로 재입학한 친구가 있었고, 3학년 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둘 다 다른 학교로 가기 전까지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었기에, 그때마다 많은 고민과 후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면서도 선뜻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고 늘 선택하지 않은 길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게. 형이 농담 삼아 던진 얘기도 쉽게 받아칠 수 없을 만큼 나는 상념에 빠져있었다. 만약 예대에 입학해 글쓰기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지금 하고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글을 쓸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마냥 기분 좋은 일만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는 거다. 선택이 바뀌더라도 그 결과가 어떨지는 언제나 미지수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형의 농담을 잘 받아치지 못하고 멋쩍게 웃고 말았고,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형도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 아닐까.
우리는, 아니 인간은 항상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아간다.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것들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사소하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일들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낯선 가게에서 계획에도 없던 메뉴를 주문하고 말았던 것처럼,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하고 갑작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말, 괜히 간지러워서 못한 말을 지금이라도 전하고 싶다. 지나간 후회는 접어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좀 더 힘 빼고 담백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이 말이 형에게 전달되었기를, 그리고 이 위로가 시간 지나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