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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혜 Apr 08. 2024

내 방어기제는 때낀 다리 트라우마

  '왜 나는 이런 사람일까?'


  '내 성격은 왜 이럴까?'


  '왜 나는 이걸 선택했을까?'


  따위의 질문에 우리는 어린 시절의 환경과 경험들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낸 시발점이라고 때로 설명한다. 주로 나의 못난 부분에 대해서 어린 시절의 약한 나를 내세워 방어하곤 한다. 어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온다는 설명은 왠지 변명 같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일 가능성도 높다. 비슷한 질문에 나는 아마 아홉 살 때 겪은 교통사고와 긴 병원 생활을 이야기할 것 같다. 활달한 꼬마가 우울한 꼬마로 변했던 순간을.



  나는 무언가 사라지는 냄새가 싫다. 진득한 냄새와 독한 약 냄새는 이제 가셨다 싶을 때 다시 어디선가 기어 나왔다. 그 냄새는 한동안 코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아주 어린 시절 교통사고가 난 적 있다. 그냥 여느 날과 같은 등교 길이었다. 너무 익숙한 심지어 2차로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동네 길에서 나는 길을 건너다 승용차에 치였다. 분명히 부딪혔지만 나는 날아가지 않았고 바퀴는 내 종아리께 위를 굴러가고 있었다. 등 뒤로는 다른 차가 휙 지나갔다. 뒤로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놀라서 아프지도 않았다. 운전자가 놀란 얼굴로 나를 뒷자리에 실어서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도착한 병원에서 나는 병원 냄새라는 것을 처음 인식했다. 소독약 냄새 같은 것이 많이 났다. 몇 사람이 응급실에 왔다 갔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놀라서 아픈 줄도 몰랐다. 엄마 아빠가 병원에 도착했고 한 의료진이 내 다리를 만지자 엄청난 통증을 느꼈던 것 같다. 당시에 파업으로 의사가 많이 없어서 나는 구급차를 타고 경주까지 이동해야 했다. 거기서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다리가 똑하고 깔끔하게 부러지지 않고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탓에 수술을 해야 했다. 



  별 탈 없이 나는 수술을 잘 받았다. 와중에 병원생활에 적응한 어린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재미있었다. 그 병원은 대학병원이라 아주 크다. 어린 내 눈에는 더 커 보였다. 아픈 사람들이 정말 많이 오고 갔다. 병원에는 온갖 상점들도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아픈 사람들을 많이 못 본 것 같은데, 병원에는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병실에 아줌마들이 잔뜩 있어서 티브이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휠체어를 끌고 복도에서 빨리 달리는 것도 좋아했다. 나는 두어 달 동안 병원 냄새에 익숙해졌다. 어떤 때에는 좀 독하다 싶었고 어떤 때에는 뭔가 깨끗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친구들이 문병을 왔고 나는 그것도 좋아했다. 



  그때 나는 가끔씩 밤에 일어나서 뒤척이고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어느 날 달을 보면서 슬퍼했고 옆에서 자던 엄마도 깜짝 놀랐는데, 돌이켜보면 애기가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꼬마가 자꾸 그러니까 대학병원에서는 정신과 진료도 같이 잡아주었다. 어차피 병원에 상주하니 중간중간 가면 됐다. 의사는 차가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서 물었고 나보다 좀 어린애들이 좋아할 법한 이런저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줬다. 그때 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소아 트라우마 치료 같은 연구를 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보통은 대학병원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할애해서 이것저것 하긴 힘드니까. 



  장기 입원환자로 나는 병원 생활을 제법 즐겼다. 8명? 10명? 아무튼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 병실에는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어느 날에는 또래였던 중국 소녀가 병상에 들어왔다. 이름에 '문'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 같은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걔는 언니였고 서커스 단원이었다. 유명한 서커스단에 속해있었는데, 당시에 그 팀이 경주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 애는 입에 지지대를 받치고 있고 위에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는 일을 하다가 입 쪽을 다쳤다고 했다. 그 애도 그 애의 보호자도 한국어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또래 친구가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당시에 요술풍선이라고 길쭉한 풍선으로 강아지나 꽃 같은 걸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걸 좋아했고 내가 그 애에게 풍선을 만들어서 주면 그 애는 고난도 요가 자세 같은 걸 하면서 발에 풍선을 얹고 떨어트리지 않는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여줬다. 나는 평생가도 못할 묘기였다. 



  다른 어떤 날엔 아줌마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었다. 다른 층에 있는 어떤 아줌마의 남편이 식물인간이라고 했다. 아줌마가 아줌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년을 병원에 있는다던데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우리 병실에는 비교적 덜 아픈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자주 웃음소리도 나고 음식도 나누어 먹고 티브이도 보는데, 아줌마는 그러지 못하겠구나 했다.



  꼬마들은 가끔씩 예방접종 같은 걸 줄 서서 맞기도 했다. 아홉 살은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닌데, 앞에 들어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면 밖에 줄 선 아이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은 주사 맞으러 간다고 했는데 왠지 다른 애들이 안 보이는 거다. 도착한 곳에서는 수술 때 다리에 박아놓았던 핀을 빼야 한다고 했고 다리에 뭔가 요상한 통증이 들었던 것 같다. 너무너무 충격적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고 깁스를 푼 내 다리는 때가 껴서 까맣고 앙상했다. 이상한 내 다리. 수술하기 전에 의사 선생님이 너 못 걸을 수도 있다고 겁을 줬었는데 까만 다리를 마주하니 정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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