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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혜 Apr 22. 2024

거울공장의 소녀

SF 단편소설 거울상

대부분의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잊혀간다.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슬픔은 그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망각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홀로 떨어져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동력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이곳도 살만하다는 안정감일 것이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기억나지 않는 과거는 소년에게는 어떤 관념으로 존재한다. 그리운 무언가. 그것이 존재했는지 아닌지조차 가끔 헷갈리는 과거의 무언가. 소년 '무힙'으로 존재했던 어떤 세상은 때로 꿈결처럼 그의 마음 앞에 다가와 살랑였다. 그 살랑임은 봄날에 가끔 마주치는 나비처럼 반가운 어떤 것이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만약 소년이 살고 있는 세상 밖을 볼 수 있었다면, 그는 다른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폐로 숨을 쉬고 심장에 피가 도는 사람들이 홀로그램으로 존재하는 소년의 세상을 만들고 통제한다는 걸 소년이 알았더라면. 





  소년의 세상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니터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늘 있는 일인 양 지루해 보였고, 몇몇은 손바닥에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무언가 적어나갔다. 또 다른 몇 사람은 눈에 고글을 써서 좀 더 생동감 있는 소년의 시점을 탐구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화면을 멈추어서 홀로그램 속 오류를 체크한 뒤 서버에 저장했다.



  한 관찰자는 퀘스트가 끝난 딱 그 순간에 맞춰 시간을 정지했다. 천사와 꽃과 식물의 조각상이 둘러싼 거울. 거울을 둘러싼 거울들. 푸른빛이 감도는 순간을. 멈춘 화면이었지만 소년은 어딘가 응시하는 것 같았다. 마치 화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관찰자는 몇 번이고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이상 없음을 체크했다. 소년의 거울공장 퀘스트는 완벽했다.



  "현재 시각 전체 퀘스트 수행 1기 중 1기가 성공하였습니다. 전체 만기 중 팔천기가 대기 중입니다. 금주 내 작업 모두 완료할 예정입니다.." A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듣기에는 말이 느리다기보다 신중하게 단어씩 말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실무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재촉할 수는 있을지 언정 A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커다란 스크린에 소년의 퀘스트 영상이 사리자고 어느새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의 얼굴이 떠있었다. 빅토리아였다. 여자는 질린다는 듯 눈을 한 번 위로 지켜떴다.  



  "A, 아니 알프레도, 아직 한기 밖에 못했나요? 좀 더 빨리 할 수는 없나? 그리고.. 그놈의 금주.. 금주.. 금일.. 은 어느 행성 기준인지. 시간에 대한 기준 좀 만들어봐요. 해 뜨고 해지는걸 본지 오래라 날짜 개념이 없겠지만요." 단발머리 여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화면에 점점 다가왔다. A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다. 빅토리아는 항상 A를 재촉할 때면 알프레도라고 불렀다. "승리를 향한 여정에 굼뜬 행동이 웬 말이야."



  단발머리의 여자가 덧붙였다. "빨리 다 꺼놓던가 좀 없애버려. 좀. 숨도 못 쉬겠어. 아니면 데이터 삭제는 어때요. 빨리 대칭으로 맞춘 애들껀 절반 날리고, 실패한 애들은 그냥 삭제하자고." 그녀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자기 머리를 한 번 쓱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기침을 한번 하더니 "그리고 저기 성공률 너무 높지 않게 조정하라고."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편 홀로그램 속 세상에서는 소년의 고민이 깊어져갔고 소녀의 열망은 짙어져 갔다. A는 거울상 퀘스트를 위한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맑은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 팔천명의 사람들이 더 이 퀘스트에 참여할 것이다. 알프레도는 한기를 느끼며 옷을 여몄다.






'아! 동의합니다!' 소년 다음으로 퀘스트에 참가한 소녀. 그녀는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가을이다. '나도 대칭 맞춰서 나갈 거야. 룰루, ' '어떤 미션을 해결해야 할까요오.' 소녀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소녀는 보랏빛 방안에 들어와서도 전혀 겁먹지 않은 기색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좋은 듯 이리보고 저리 보는 모습이 영락없는 십 대 소녀이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은 허리선까지 떨어졌다. 사람들은 가을에게 매력적이고 예쁘다는 칭찬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가을에게는 늘 뭔가 모자랐다. 아마도 스스로가 자신의 얼굴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아서가 아닐까? 가을은 항상 통통한 왼쪽 뺨을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살짝 가렸다. 하지만 그건 왠지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을은 항상 자신의 얼굴을 조금 고치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약간 못생겼네?'라거나 '역시 너도 완벽하지 않구나.'라고 말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가을이는 몰랐다. 아니 잊고 말았다. 알프레도와 동료들이 이 세상을 처음 계획하고 만들었을 때 얼마나 확신에 차있었는지를. 또 처음 세계에 심을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얼마나 고심해서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가을은 그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소년과 소녀가 적응해 나가는 과정들을 보며 알프레도와 동료들은 성취감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알프레도는 캐릭터들을 만드는 동안 이 작은 존재들이 대칭 따위를 중요히 여길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의 원래 모습과 가장 유사하게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해서 만들었다. 그들을 위해서. 공들여서. 알프레도, A는 어떤 세계를 창조한 창조자였고, 개발자였고, 지구에서 떠나온 생존자였다. 그리고 지구를 떠나는 우주선에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하나하나 빚어 홀로그램 세계에 적응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는 격세지감을 느끼며 가을을 보고 있었다. 가을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던 모습은 알프레도의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처음으로 홀로그램에 접속한 날 가을이는 신체를 움직이는 훈련 튜토리얼을 완벽하게 끝냈다. 그리곤 "저는 여기서 더 자유로워요! 빨리 정말 이식되면 좋겠어요."라며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잠깐 바라보았다. 알프레도는 가을의 티 없는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공간이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꼈다. 그러다 문득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작업이 두려워졌다.



  가을은 예전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게임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미니게임의 존재는 알려졌지만 세부내용이 비밀인 건 이 제한 조건 때문인가?' 소녀는 아까 만난 소년이 게임에 대해 말하지 못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리곤 '아! 동의합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거울이 다시 말했다. '퀘스트에서 실패하면 페널티를 얻게 됩니다.' 



  '빛이 당신의 얼굴 중앙을 지날 때 박수를 치고 그를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 중 한쪽을 고르면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역시 너무나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거울의 말이 끝나자 거울의 왼쪽 모서리에 수직으로 그어진 레이저의 빛이 들어온다. 거울 주변의 장식물들이 소녀에게 뻗어 나오는 듯했다. 



  가을은 눈을 부릅떴다. 빛이 소녀에게 닿았다. 불빛은 가을이의 머리카락에서부터 광대 끝, 눈꼬리를 쓸었다. 빛이 눈에 닿기도 전에 소녀는 움찔 몸을 떨었다. 흐트러져 버린 균형에 가을이 당황했다. 



 '어'



  빛은 소녀의 왼쪽 눈을 지나 콧잔등을 넘었고 오른쪽 눈을 향했다. 



  고민하다 가을은 '짝!'하고 손뼉을 쳤다. 빛은 소녀의 눈앞머리에 맺혔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실패했다. 어떻게 되는 거지?- 소녀는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조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유토피아'에서는 불이익이 좀 있다한들 그냥 지내면 된다. 다른 유저들이 도와주기도 하고. 금방 회복할 수 있다.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잠깐의 정적 이후에 거울이 말했다. 빛이 꺼지고 온통 어둠뿐이었다. '왼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오른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어두운 방 안에서 소녀가 외쳤다. '여기서 뭘 선택해! 양쪽 다 말이 되지 않잖아!'



  '왼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오른쪽을 택하시겠습니까?'  10초 내에 선택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오른쪽이 선택됩니다.' 거울이 다시 한번 말했다. 전혀 감정의 동요 없는 기계음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다시 하게 해 줘! 대칭이 안되잖아!' 소녀는 사정했다.



  '대칭으로... 가능합니다. 10, 9, 8, 7, 6...'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소녀는 당황스러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시계에서는 진정하라는 알람이 울렸다. 소녀의 시계에서 나오는 빛이 방을 조금 밝혀주는 듯했다. 소녀는 이대로 집으로 격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거울은 최종선고를 내렸다. '선택하지 못했으니 자동으로 오른쪽 얼굴을 선택합니다.'



  소녀의 얼굴은 일순간에 코와 입이 사라지고 눈끼리 맞붙은 길쭉한 타원으로 변했다. 소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쓰러지는 그녀의 머리칼이 찰랑였다. 그녀의 형체가 지지직거렸다. 이게 뭐냐는 듯 그녀는 커다란 눈을. 커다란 두 개의 붙어버린 눈을 지켜떴다. 그녀는 바닥에 엎어진 채 가녀린 손으로 연신 얼굴을 만졌다. 



   거울이 말했다.



  '프로그래밍 오류. 유저의 얼굴은 사람과 같이 구성된다. 일반형태와 50% 이상 차이 나면 삭제합니다. 선내의 신체 또한 파기됩니다.' 소녀는 문득 선내의 신체라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과거에 어떤 배를 탔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소녀의 형체가 지지 직하며 사라졌다. 화면 밖의 알프레도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책상을 짚었다. 그러다 픽 넘어져버렸고 책상 위의 물건들도 같이 떨어져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센터장인 빅토리아가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려 알프레도를 보았다. 빅토리아의 시선 끝에 닿은 알프레도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빅토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알프레도에게 다가가 말했다. "애초에 목표한 만 명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가는 건 불가능해." 



  "알아요." 알프레도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어떻게든 쟤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자고. 얘는 내가 끝까지 가지고 싶었던 애야." 빅토리아가 알프레도에게 말했다.  



  "내 탓이라는 거예요?" 알프레도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잠자고 있는 만 명의 사람들과 연구진들 모두를 데려갈 충분한 산소가 없는 것 알고 있잖아. 네가 만든 홀로그램 메타도 생각보다 데이터를 많이 잡아먹어서 열이 많이나. 산소가 모자라지면 우리는 모두 자멸인 거 알잖아." 빅토리아가 알프레도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알아요. 다 안다고요." 알프레도는 벌떡 일어나 빅토리아와 사람들을 뒤로한 채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쯧쯧. 저렇게 쿵쾅거리면 무릎이 아작 날 텐데." 빅토리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실제로 알프레도도 지구를 떠나 올 때보다 많이 늙어서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했고, 지구를 떠나올 때 소녀였던 빅토리아도 어느덧 제법 고집스러운 어른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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