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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Nov 01. 2020

[시간을 채우는 것]


 나는 자극적인 맛을 좋아한다. 빵보다는 밥이라 빵을 자주 먹진 않는데 먹어도 피자빵이나 소시지빵, 베이비 슈 종류만 좋아한다. 은근 편식쟁이라서 콩, 견과류, 순두부, 고구마, 호밀빵처럼 특징이 뚜렷하지 않고 심심한 맛은 싫어한다. 단 걸 좋아하고 반대로 쓴 걸 싫어하는데 그래서 커피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땐 친구들 따라 마시기도 했는데 갈수록 입에 맞지 않아 안 마신 지 꽤 되었다. 나는 빵도 커피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카페에 가는 비용이 아까웠다. 특히 약속 시간에 일찍 도착해서 머물 곳이 없어 잠깐 카페에 들러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니 그 비용으로 더 맛있는 걸 먹자는 생각에 카페에 있는 에이드나 주스 등 다른 음료들을 먹기 시작했는데 아직 눈 돌아가게 맛있는 음료는 먹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좀 나아지긴 했지만 용돈 받아 생활했을 때라 그랬는지 시간 때우려고 카페에 가는 일은 늘 아까웠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출근 전에도 보통 4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해 준비를 하곤 하는데 유독 그러기가 싫은 날이었다. 그런데 습관처럼 또 일찍 도착해버렸다. 일이야 늘 하기 싫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 그래서 내 시간을 일터에 묶어 두고 싶지 않았다. 겨우 15분 때울 공간이 필요해 일층 카페에 들어갔다. 주문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무언가 마시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돈 아까운데 그냥 올라갈까?’ 싶기도 했지만 마음을 뿌리치고 대범하게 아이스티를 시켰다. 15분이 긴 시간도 아니지만 출근 시간 전에는 특히 더 빠르게 사라지는 시간이다. 잠깐 앉아있었는데 나갈 시간이 되었고 음료는 이제 겨우 한 입 마셨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은 음료를 보고 아깝다는 생각이 아니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500원을 주고 아이스티를 산 게 아니라 출근 전 소중한 15분을 샀다는 생각에 문득 들어 그랬다. 게눈 감추듯 재빠르게 사라지긴 했지만 일 시작 전 심호흡을 할 수 있었고 나를 위한 비용을 지불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전에는 맛없는 커피를 사고 붕 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쾌적한 공간에서의 귀한 시간을 사는 거라고 생각하니 이만큼 합리적인 소비가 또 어딨나 싶다. 게다가 그 시간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니 스스로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그 또한 만족스러웠다. 


 출근 전, 약속 전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출근 전, 약속 전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생각의 전환이 참 좋았다. 날 위해 마련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졌고 그러다 보니 외출 전 자연스럽게 책을 챙기게 됐다. 빈 시간을 책으로 채우기 위해서이다. 시간을 때운다는 느낌은 시간을 꼭 버린다는 느낌과 비슷해서 앞으로는 시간을 채우기로 한 거다. 약속 전 시간이 붕 뜰 때에나 이동하는 시간에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봤던 뉴스를 보고 또 보고 의식 없이 소비할 콘텐츠가 더 없나 기웃거리며 시간을 때웠는데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이동하는 시간에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창밖을 보며 머리를 식힌다. 아무 생각 안 하고 밖을 보며 멍 때리는 일이 아무 생각 안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좋다. 머리를 쉬어주기도 하고 몸을 쉬어주기도 하면서 시간을 채운다. 책을 읽기도 하고 책을 쓰기도 하며 시간을 채우니 만족감이 매우 크다. 나는 이제 커피를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마련하고,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시간을 채우며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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